항목 ID | GC40001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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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飛山洞 遺蹟 |
이칭/별칭 | 대구 비산동 200-82유적,대구 비산동 202-1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200-82|달서로14길 31[비산동 202-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민선례 |
조성 시기/일시 | 삼국시대 - 대구 비산동 유적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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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5월 30일~6월 8일 - 대구 비산동 유적 경북대학교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11월 15일~11월 30일 - 대구 비산동 유적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소재지 | 대구 비산동 유적 -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200-82|달서로14길 31[비산동 202-1] |
성격 | 고분군 |
양식 | 나무덧널무덤[목곽묘]|돌덧널무덤[석곽묘] |
[정의]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위치]
대구 비산동 200-82유적과 비산동 202-1유적은 현 제일고등학교 남쪽 200m 거리에 있는 구릉에 있다. 대구 비산동 200-82유적은 비산4동의 상록경로당에서 대구비산도서관 방향으로 이어지는 소방도로 구간에 해당하며, 비산동 202-1유적은 현재 대림황실빌라가 들어선 곳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8년 5월 30일부터 6월 8일까지 경북대학교에 의하여 발굴 조사된 대구 비산동 200-82유적에서는 나무덧널무덤[목곽묘] 3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기가 조사되었다. 1999년 11월 1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된 대구 비산동 202-1유적에서는 나무덧널무덤[목곽묘] 2기, 돌덧널무덤[석곽묘] 3기가 조사되었다.
[형태]
대구 비산동 유적(大邱飛山洞遺蹟)에서 봉토분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지만, 지하에 나무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나무덧널무덤은 비산동 200-82유적의 2·5호묘와 비산동 202-1유적의 3호묘가 해당된다. 특히 비산동 202-1유적의 3호묘는 묘광 길이가 650㎝, 너비 260㎝ 정도로 대구 지역에서 조사된 무덤 중 대형에 속한다. 나무덧널무덤에서 3세기 중엽부터 4세기 전반대로 편년되는 삿무늬짧은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나무덧널무덤의 조사를 통하여 달성 고분군의 조영 시기는 고총고분기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초기에는 주로 평리동과 비산동을 중심으로 조영되었다가 점차 비산동과 내당동 쪽으로 묘역이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
대구 비산동 유적에서 굽다리접시[고배], 뚜껑[개], 짧은목항아리[단경호], 귀항아리, 화로형토기, 그릇받침[기대]과 쇠투겁창[철모], 쇠화살촉, 쇠낫[철겸], 쇠도끼[철부], 발걸이[등자], 말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대구 비산동 유적은 발굴 조사 이후 도로와 주택이 건설되어 유적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대구 비산동 유적은 일제강점기 서문시장 건설과 6·25전쟁 이후 도시화에 의하여 고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으나 지하에 고분이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덧널무덤의 조사로 고총고분시기보다 더 일찍 달성 고분군이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