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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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達城 古墳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비산동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민선례 |
조성 시기/일시 | 삼국시대 - 대구 달성 고분군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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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23년 10월 - 대구 달성 고분군 노모리 켄[野守 健]과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5월 30일~6월 8일 - 대구 달성 고분군 대구 비산동 200-82번지 유적 경북대학교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11월 15일~11월 30일 - 대구 달성 고분군 대구 비산동 202-1번지 유적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8년 7월 7일~9월 12일 - 대구 달성 고분군 대구 비산동 405-1번지 유적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3년 9월 23일~10월 1일 - 대구 달성 고분군 대구 비산동 1717-75번지 유적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4년 5월 20일~6월 13일 - 대구 달성 고분군 대구 내당동 955-17·955-18번지 유적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5년 8월 11일~8월 15일 - 대구 달성 고분군 대구 비산동 200-8번지 유적 세종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7년 4월 24일~4월 27일 - 대구 달성 고분군 대구 비산동 265-9번지 유적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발굴 조사 |
소재지 | 대구 달성 고분군 -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내당동 일원 |
성격 | 고분군 |
양식 | 나무덧널무덤[목곽묘]|돌덧널무덤[석곽묘] |
크기(높이,지름) | 3.7~30.3m[봉토 지름] |
[정의]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과 내당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개설]
대구 달성 고분군(大邱達城古墳群)은 달성토성의 남서쪽에 있으며 달성토성과 함께 대구의 중심부에 있는 유적이다. 일제강점기 조사 때 행정구역상 ‘달서면 고분군’으로 명명되었다가 193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비산·내당동 고분군’으로 불리었다. 최근에는 인접한 달성에서 이름을 따 ‘달성 고분군’으로 불린다. 대구 달성 고분군은 분포 지역에 따라 크게 5개의 군으로 구분된다. Ⅰ군은 달성토성 남서쪽에 연결된 구릉상에 분포하며 28기[6~33호]가 확인되었다. Ⅱ군은 Ⅰ군의 동쪽 낮은 구릉에 분포하며 37기[34~70호]가 확인되었다. Ⅲ군은 달성토성 바로 서쪽에 접하여 분포하는 5기[1~5호], Ⅳ군은 Ⅱ군의 서남쪽에 분포하는 12기[71~82호], Ⅴ군은 Ⅳ군의 북서쪽에 분포하는 5기[83~87호]이다. Ⅰ군과 Ⅱ군은 각각 대형분[65호, 59호 등]을 중심으로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위치]
대구 달성 고분군은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에 있다. 신천의 범람원을 동쪽에 두고 남서에서 북동으로 길게 뻗은 중앙 구릉지의 북쪽 말단 부분에 축조된 달성토성의 남서쪽 얕은 구릉에 분포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대구 달성 고분군은 1923년 10월 서문시장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노모리 켄[野守 健]과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고분군 중 7기[34호 2곽, 37호, 50호, 51호, 55호, 59호, 61호]를 조사하였으며, 토기류, 무기류, 마구류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23년 조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구제 발굴로 추정되나 달성 고분의 등록 보존이나 추가적인 연구 등 이후의 과정은 매우 불성실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식민지 문화정책의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다가 1998년 5월 30일부터 6월 8일까지 경북대학교에 의하여 비산동 200-82번지 일대의 소방도로 건설을 위하여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9년 11월 1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인접한 비산동 202-1번지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2008년 7월 7일부터 2008년 9월 12일까지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조사된 대구 비산동 405-1유적에서 삼국시대 돌덧널무덤[석곽묘] 12기, 수혈 4기, 구 1기 외 고려~조선시대 수혈, 고상식건물지, 구, 토광묘, 목관묘, 집석유구, 우물, 주혈 등이 조사되었다. 2013년 9월 23일부터 10월 1일까지 한국문화재재단에 의하여 조사된 대구 비산동 1717-75번지유적에서 삼국시대 돌덧널무덤 2기, 독무덤[옹관묘] 1기, 호석 1기가 조사되었다. 2014년 5월 20일부터 6월 13일까지 삼한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조사된 대구 내당동 955-17·955-18번지 유적에서 삼국시대 수혈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2015년 8월 11일부터 8월 15일까지 세종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조사된 대구 비산동 200-8번지 유적에서 삼국시대 돌덧널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2017년 4월 24일부터 4월 27일까지 한국문화재재단에 의하여 조사된 대구 비산동 265-9번지 유적에서 삼국시대 돌덧널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형태]
대구 달성 고분군 봉토는 대부분 원형이나 타원형이며, 봉토의 지름은 3.7~30.3m 정도이다. 이 중 지름 30m 이상의 59호분은 규모는 물론 구릉의 최상부에 있어 상징성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단곽식, 주·부곽식, 다곽식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앞트기식돌덧널무덤[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이 확인된다. 구덩식돌덧널무덤이 먼저 축조되고 앞트기식돌덧널무덤은 나중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앞트기식돌덧널무덤의 축조에 거대한 판석을 사용한 특징이 확인된다. 1998년 이후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나무덧널무덤[목곽묘]과 돌덧널무덤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
대구 달성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굽다리접시[고배], 뚜껑[개], 뚜껑접시[유개완], 굽다리짧은목항아리[대부단경호], 굽다리긴목항아리[대부장경호], 귀달린항아리[양이부호·삼이부호], 입큰귀때단지[광구소호], 그릇받침[기대], 시루, 흑갈색연질토기, 가락바퀴[방추차] 등의 토도류와 금동관, 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 은제 또는 금동제 새날개모양관장식[조익형관식(鳥翼形冠飾)], 금제굵은고리드리개[금제태환수식(金製太鐶垂飾)], 금제가는고리귀고리[금제세환이식(金製細鐶耳飾)], 굽은옥장식목걸이[곡옥부경식(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세 잎 고리자루 큰칼[삼엽환두대도(三葉環頭大刀)], 쇠손칼[도자], 쇠화살촉, 쇠투겁창[철모], 쇠도끼[철부], 쇠낫[철겸], 철제끌, 말띠드리개[행엽(杏葉)], 재갈 등의 금속류가 출토되었다. 금동관, 은제 또는 금동제 관식, 귀걸이, 목걸이, 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고리자루큰칼 등의 유물들[37·50·51·55호분 출토]은 대부분 경주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신라의 왕릉 부장품에 다음가는 위세품이며, 능선의 정상부에 열을 지어 조영된 대형분에서 출토되었다. 대구 달성 고분군의 대형분에 묻힌 피장자들이 대구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지배 집단이었음을 알려 준다.
[현황]
대구 달성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화에 의하여 파괴되고 주택단지가 조성되었지만, 1998년 이후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지하에 무덤이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후 고분군 내 공공도서관 건립, 건물 개축 및 재건축 등에 의한 소규모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서 대구 달성 고분군에 대한 부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 달성 고분군은 1998년 이후 고분군에 대한 소규모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고분군의 분포 범위와 무덤 양상이 확인되었다. 대구 달성 고분군은 널무덤 단계부터 형성된 집단이 하나의 정치체로 성장하면서 조영한 고분군이며, 기원전부터 6세기 전반까지 대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최상층 집단이 축조한 고분군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