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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36
한자 大丘判官|大邱判官
이칭/별칭 대구사또,대구원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두

[정의]

조선 후기 대구도호부의 지방 행정을 책임지던 종5품 지방관.

[개설]

조선시대 국왕의 명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을 수령(守令)이라고 한다. 농민들은 수령을 안전(案前), 사또[使道], 또는 원님 등으로 일컬었다. 대구판관은 대구사또 또는 대구원님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내용]

대구도호부는 종3품 도호부사[부사]가 부임하던 곳이었지만, 1601년(선조 34) 대구부경상감영이 설치되고 경상감사가 대구부사를 겸하면서 대구부의 행정은 대구판관(大丘判官, 大邱判官)이 담당하였다. 효종·숙종·영조 때 일시적으로 감사와 부사를 분리하여 판관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대구판관대구부의 수령 역할을 하였으며 임기도 비교적 긴 60개월이었다.

판관은 종5품직으로 비교적 낮은 직급이었다. 그러나 대구판관경상감영이 있는 큰 고을을 다스리기 때문에 관록 있는 이들이 부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17세기 중엽 이후 대구판관은 주로 음관(蔭官)을 임용하는 자리였다. 음관은 가문을 배경으로 벼슬살이를 하는 이들이었으며,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객사인 달성관(達城館)의 전패(殿牌) 앞에서 국왕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과 객사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의식은 부사를 겸한 경상감사가 주관하였다.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부의 판관은 수시로 감사와 비공식적인 접촉을 하면서 보좌관 구실을 하였다. 그리하여 감사의 정기적인 평가나 암행어사의 평가에서 나쁜 평가를 받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감사가 탄핵될 때에는 함께 탄핵되기도 하였다.

17세기 말 대구판관 신처화(申處華)는 청렴결백하고 고을을 잘 다스려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신처화의 위패를 모셨다. 1713년부터 1716년까지 재임한 유명악(兪命岳)은 ‘석빙고’를 세워 백성들이 얼음을 구하여 바치는 부담을 크게 덜어주어 주민들이 유애사(有愛祠)를 지어 유명악의 위패를 모셨다. 생사당·유애사·선정비는 당시의 농민들이 수령 개인의 자질이나 덕성에 기대가 컸다는 것을 보여 준다.

대구판관 중 일부는 토착세력과 경상감사의 지원을 바탕으로 토목 공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1764년에 부임하여 1768년까지 재임한 김로(金魯)는 9개나 되는 저수지를 수축하였다. 1776년에 부임한 이서(李溆)는 1778년 신천(新川)에 제방을 쌓아 신천이 범람하여 향교의 문묘와 읍성이 잠기는 일이 없게 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이공제비(李公堤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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