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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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文人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덕제 |
[정의]
한국문학의 형성기인 1920년대부터 ‘대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시, 소설, 아동문학, 평론 등 전 장르에 걸쳐서 한국 근대문학을 개척하고 일군 작가.
[개설]
대구의 문인은 한국 문학의 형성기인 1920년대부터 ‘대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시, 소설, 아동문학, 평론 등 전 장르에 걸쳐서 한국 근대문학을 개척하고 일군 작가를 말한다. 대구의 문인을 정의할 때 지역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 하는 범주는 그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인 지역 문학의 범주는 지역 거주자가 중심이 되어 창작한 작품을 일컫는다. 이 경우 타 지역 출신이지만 대구 지역에 거주하면서 창작 활동을 한 작가도 포함된다. 이런 기준에 의하면 대구의 문인은 대구 지역 거주자로 한정된다. 그러나 지역 문학은 그 지역 출신이면서 타지에서 활동하면서 작품 생산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대구의 문인은 대구 지역 출신 문인과 대구 지역 거주 문인을 모두 포함하여야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까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까지 활동한 대구의 문인은 이장희[1900~1929], 이상화[1901~1943], 이상백[이상화 동생], 백기만[1902~1969] 이외 유치환[1908~1967], 이육사[1904~1944], 이호우[1912~1970], 박목월[1915~1978], 이설주[1908~2001], 이효상[1906~1989], 이윤수[1914~1997], 황윤섭[1916~1951] 등의 시인과 소설가 현진건[1900~1943], 백신애[1908~1939], 장덕조[1914~2003], 장혁주[1905~1998], 김동리[1913~1995], 희곡가 김영보[1900~1962]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아동문학 분야에서는 윤복진[1907~1991], 이응창[1906~1973], 신고송[1907~?], 김성도[1914~1987]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의 문인은 동인을 결성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한다. 백기만, 이상화, 이상백은 1917년 『거화(炬火)』라는 동인지를 통하여 시를 발표하며 지역 시문학을 발아시켰다. 백기만은 1923년 『금성』의 창간호에 동시 「청개구리」 등 3 편을 발표하였다. 이상백도 『금성』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장희는 백기만과 함께 『금성』 5월호에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진건의 「빈처」[『개벽』, 1921], 「운수 좋은 날」[『백조』, 1924],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백조』, 1923],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 등을 대표작으로 들 수 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서구문학의 사조가 유입되면서 『창조』, 『폐허』, 『백조』, 『금성』 등의 동인이 결성되어 한국 근대문학 형성의 주축이 되었다. 이 시기에 현진건과 이상화는 『백조』 동인으로, 또 백기만과 이장희는 『금성』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대구의 문인 중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는 현진건, 백신애, 장덕조, 장혁주, 김동리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진건은 1920년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는데, 단편소설 「빈처」[1921]·「술 권하는 사회」[1921] 등에서 암울한 식민지 현실과 봉건적 질서에 억압당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현실을 고백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개벽』 65호, 1926] 등의 비평을 통하여 식민지시대의 조선 문학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김동리는 대구 계성학교를 다녔으며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白鷺)」가 입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바위」[1936], 「무녀도」[1936], 「황토기」[1939] 등을 발표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역마」[1948], 「등신불」[1961], 「늪」[1964], 「까치소리」[1966], 「저승새」[1977] 등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1955~1957], 「을화」[1978]를 발표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문예지 『월간문학』[1968]과 『한국문학』[1973]을 창간하여 한국 문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백신애는 1929년 단편 「나의 어머니」를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1927년경에 시베리아에서 유랑생활[4~6월]을 하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꺼래이」를 『신여성』 1934년 1~2월호에 연재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대부분의 작품이 농촌을 배경으로 한 가난과 무지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것들로 여성운동 출신 작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장덕조는 1932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신여성』 편집기자로 활동하던 중 이태준의 추천으로 등단하였고 이후 1935년에는 『매일신보』에 연재소설 「은하수」를 연재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다수의 친일 성향 작품을 발표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6·25전쟁 중 피난지 대구에서 영남일보 문화부장을 맡았으며 여성 종군기자 겸 육군종군작가로 활동하였다. 1950~1960년 사이 언론사에 근무하면서 신문연재 소설 「광풍」[『동아일보』, 1953~1954], 「낙화암」[『동아일보』, 1956~1957], 「벽오동 심은 뜻은」[『한국일보』, 1963~1964], 「이조의 여인들」[『한국일보』, 1968~1972], 「다정도 병이련가」[『신태양』, 1954], 「지하 여자 대학」[『중앙일보』, 1968] 등을 발표하였고, 역사소설을 많이 발표한 여성작가이다.
한편 일제강점기 아동문학은 소년문예운동을 전개하면서 형성되었는데 소년문예운동의 중심에 윤복진이 있다. 윤복진은 대구의 사립 희원보통학교[현재 대구초등학교]를 나와 계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문학평론가 김문집, 화가 이인성, 정경모, 오해룡, 백대윤 등과 함께 대구소년회의 소년 단원으로 활동한다. 1926년에는 소년문예단체 등대사를 창립하여 신고송, 송완순, 승응순 등과 같이 활동하였다. 김성도는 1928년 4월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때부터 아동문학잡지 『별나라』 등에 동요를 투고하였고, 1931년 4월 경성 경신학교로 전학한 후에는 『별나라』,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더 많은 작품을 투고하였다. 박영종[목월]은 1934년 6월에 『어린이』에 「통·딱딱·통·짝짝」이 ‘특선 동요’로 당선되었고, 1934년 『신가정』 6월호에 동요 「제비마중」이 당선되어 소년문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박목월은 『아동』 주간을 맡아 꾸렸고 동요, 동시 그리고 동요 감상 등 다양한 갈래의 글을 발표한다.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활동한 대구의 문인은 시인 이호우, 황윤섭, 김홍섭, 신동집, 김춘수와 소설가 김진태, 김동사[본명 득룡] 그리고 아동문학가 윤근필[윤운강], 김요섭 등이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26일 시동인 죽순시인구락부가 결성되어 지역 시단을 이끌어 냈는데 이윤수, 최무영, 김동사, 오란숙, 최양응, 이영도, 이병화, 유치환, 이호우, 박목월, 최해룡 등이 참여하였다. 『죽순』 동인 대부분은 6·25전쟁 중에 결성된 문총구국대 경북지대 종군작가로 참여한다.
해방기 대구 지역 아동문단은 조선아동회와 아동잡지 『아동』, 『새싹』 등의 창간으로 활기를 되찾는다. 해방기에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이응창, 박영종, 김성도, 윤복진 등이 그대로 참여하고 이들 아동단체와 잡지를 통하여 이호우(李鎬雨, 爾豪愚), 김진태[필명 金信一], 윤근필(尹根弼)[필명 尹蕓崗], 김요섭, 박은종, 김홍섭(金洪燮)[필명 晩山], 이효상(李孝祥)[필명 한솔], 윤혜승(尹惠昇) 등 일반 문학을 하던 시인이 합류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김진태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소설 「이민(移民)의 아들」[1941]이 당선되고, 이어 『만선일보』 소설 콩쿠르에 「광려(光麗)」[1942]가 입선되었다. 해방 공간에는 아동문학에 매진하기 위하여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고집쟁이 양」[1947. 1. 26.]이 당선되기도 하였다. 김홍섭은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전문부를 수료하였고, 해방 후 대구농림학교와 계성학교, 대륜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동』과 『새싹』에 관여하고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해」[1950]가 당선된다.
전쟁기[1950~1953]라 일컫는 피난 문단 시절에는 시인 김남조, 김상화, 석계향, 여영택, 윤혜승, 그리고 소설가 이규헌, 김준성, 서석달 등이 활동하였다. 아동문학 분야는 이종택, 이종기, 박목월, 김동사 등이 활동한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남하한 문인들이 대전에 이어 대구 지역에서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를 결성하고 이효상, 김사엽, 박양균, 이윤수, 김진태 등이 종군작가로 참여한다. 1951년 1·4후퇴 때 대구에서 공군종군문인단[일명 창공구락부]이 1951년 3월 9일 결성되었고 조지훈, 박목월, 이윤수, 최광렬, 김동리, 박훈산 등이 참여한다. 1951년 5월 26일에는 육군종군작가단이 대구아담다방에서 결성되었는데 구상을 단장으로 하여 영남일보사에 본부를 두고 장덕조, 이호우, 박기준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종군작가단에서 발행한 잡지는 『전선시첩』, 『전선문학』, 『창공』, 『코멘트』 등이 있다. 또 유치환을 중심으로 설창수, 구상 등은 동인지 『시와 시론』을 발행하였다. 종군하면서도 개별 작품집을 내어 전쟁의 폐해를 고발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문학으로 전쟁의 공포를 위무하고자 하였다. 김남조의 『목숨』[수문관, 1953], 『십자로』[문성당, 1953], 김춘수의 『기』[문예사, 1951], 『인인(隣人)』[문예사, 1953], 박양균의 『두고 온 지표』[춘추사, 1952], 유치환 『보병과 더불어』[행문사, 1951], 이설주의 『거화』[문성당, 1951], 『미륵』[춘추사, 1952] 등을 대표적인 전시 작품집으로 꼽을 수 있다. 김동리는 이 시기에 『영남일보』에 스탈린을 풍자한 소설 「스딸린의 노쇠」[1951. 6. 7.~1951. 6. 18]를 연재하였다. 이처럼 한국전쟁기에 대구의 문인은 피난 문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윤수, 박양균, 이효상, 박훈산, 박목월, 유치환 등의 시인과 김동리, 장덕조, 김동사, 최민순 등 대구의 문인이 다수 참여하여 전쟁의식을 북돋우며 한편으로는 전쟁의 참상을 비판하였다. 전시 작품들은 작품성의 문제를 떠나서 전쟁문학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로써 대구의 문인은 다시 한번 한국 문단의 중심에 자리매김하게 된다.
[6.25전쟁기]
6·25전쟁 중에 피난지 대구 지역에서 아동문학 잡지 『소년세계』가 이원수에 의하여 창간된다. 『소년세계』를 통하여 대구의 문인 박목월과 김동사 등이 작품 발표를 이어 갔고, 이종기와 이종택 등은 신인으로 전후 한국 아동문학을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된다. 이종택은 1943년 첫 동시 「오포 소리」를 발표한 이후 『소년세계』와 『새벗』 등의 아동문학 잡지에 다수의 동요, 동시를 발표하였다. 등사판 동시집 『별똥별』[1947] 이후 『사과와 어머니』[계몽사, 1953], 『바다와 어머니』[인간사, 1959] 등의 동시집을 발행하면서 전후 1950년대 지역 아동문학의 역량 있는 동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이종기는 한국전쟁 중 대구 지역에서 발행된 『소년세계』에 동시와 산문 등 다수의 글을 발표하였고, 1955년에는 한국아동문학회 동시부문 위원을 지냈다. 서사 동시집 『하늘과 땅의 사랑』[아인각, 1967]을 발행하였다. 이종기와 이종택의 활동은 전쟁기 피난 아동문단이 잡지 『소년세계』와 이원수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소외되었던 대구 지역 아동문학의 맥을 이어 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종택은 전쟁 후 1957년에 이응창이 창립한 대구아동문학회 간사를 맡으면서 대구 지역 아동문단에 합류한다. 대구아동문학회는 김성도, 김진태, 윤운강, 여영택(呂榮澤), 이민영(李珉永), 윤혜승, 서월파, 신송민(申松旻), 박인술(朴仁述), 서광민, 정휘창(鄭輝昌) 등이 초기 회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에 소설 분야의 문인으로 서석달과 윤장근을 들 수 있다. 서석달[1928~1993]은 195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돌각담」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소설가이다. 소설집으로는 『금붕어』[집문사, 1963]와 『엽사전(獵師傳)』[형설출판사, 1969], 일어판 『엽사전(獵師傳)』[동경 복영서점, 1982] 등이 있고 1987년 대구소설가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지역 소설 문단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윤장근[1933~2015]은 1957년에 창립된 경북문협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70년에는 대구문인협회 소설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소설집 『돌아온 사람』[영웅출판사, 1967]을 발행하였다.
[1960년대 이후]
1960년대는 전후 문단이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 속에 새롭게 재편되면서 백기만, 박목월, 유치환, 김춘수, 신동집, 이설주, 이효상, 이윤수, 박훈산, 전상렬, 김종길, 허만하, 김윤식 등이 대구의 시문학을 주도하였다. 1970~1980년대는 동인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자유시[1976~1983], 문학·경부선[1975~1999]의 동인은 1970년대 신진작가의 진출 통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자유시 동인은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억압, 참여시와 순수시의 첨예한 대립 등을 지양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공통분모로 하여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연스런 에꼴을 이끌어 내려는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당시 20대 전후의 젊은 작가들로 박정남, 박해수, 이경록, 이기철, 이동순, 이태수, 이하석, 정호승 등이 참여하였다. 문학·경부선 동인은 박곤걸, 설성희, 김월한, 오태순, 장윤익, 김승규, 김종자, 오태순, 이주혁, 김형수, 이택종, 서정호, 이구형, 유상덕, 전문수, 홍판식, 하청호, 김몽선, 김상훈, 김상삼, 이기철, 제해만 등 대구사범학교와 대구교대 출신 작가들로 이루어진 시, 수필, 평론, 아동문학 등 범 장르적 문학단체이다.
한편 1980년대 동인 형상[1980], 분단시대[1984], 오늘의 시[1983~2003], 자연시[1986~1997] 등은 다양한 이념을 전대의 문학적 성취를 다양하게 이끌어 낸다. 구석본, 김영수, 박재열, 이구락, 이재훈, 이진홍, 문인수 등이 참여한 형상은 1970년대 말 당시 현대시가 문학 외적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참여시의 경향이 증가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문학의 내적 본질에 충실하자는 취지로 창립된 동인이다. 다양성에 입각하여 조화의 문학을 강조하였다. 한편 분단시대 동인의 문학적 성향은 현실의 모순과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비판하면서 일제 잔재 청산과 반외세 그리고 분단 극복을 위한 문학운동을 목적으로 삼았다. 경북대학교 복현문우회 출신의 배창환, 정대호, 김종인 등과 계명대학교 노천문학회 출신의 김용락 등이 분단시대 동인을 이끈 대구의 문인이다. 오늘의 시 동인은 분단시대 동인과는 대립적인 시각에서 출발한 시 동인으로 ‘시는 삶이다’는 대전제를 문학적 사유를 지향하며 1983년 창립되어 1980년대 이후 대구 지역의 문단을 이끈 문학 동인 중의 하나이다. 대구에서 문청 시절을 함께 보낸 김재진, 배창환, 장옥관, 엄원태, 정화진, 박진형, 손진은, 노태맹, 송재학 등이 핵심 멤버였다. 자연시 동인에서 활동한 대구의 문인은 윤태혁, 박곤걸, 하청호, 송진환, 이유환, 조행자, 박정남, 박소연, 이숙희, 권운지 등 『현대시학』 출신 작가들이다. 자연시 동인들은 자연의 훼손이 인간성마저 상실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자세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문학 정신을 견지하였다. 이처럼 대구의 문인은 한국 근대문학 형성기부터 시, 소설, 아동문학 등의 장르에서 한국 현대문학을 개척하면서 대구 지역 문단을 형성하고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