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0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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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芮大僖 |
이칭/별칭 | 국언(國彦),소남(小南),희재(希齋),이산(伊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상동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 예대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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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예대희 송병선과 송병순의 문하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예대희 만주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예대희 귀국하여 공주에 정착 |
몰년 시기/일시 | 1939년 - 예대희 사망 |
출생지 | 예대희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
거주|이주지 | 예대희 이주지 - 충청남도 공주시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의흥 |
대표 관직|경력 | 한인 공교회 지회 설치 |
[정의]
근대 청도 출신의 학자.
[개설]
예대희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어버리자 1912년 식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이승희·맹보순과 함께 국권 회복 방안을 논의했고, 이승희와 함께 공교회 운동에 참여하여 한인 공교회 지회를 설치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가계]
본관은 의흥(義興), 자는 국언(國彦), 호는 소남(小南)·희재(希齋)·이산(伊山). 증조할아버지인 예지열(芮之烈)은 성담 송환기(宋煥箕)에게서 수학하였다. 아버지는 예동채(芮東彩)이고, 어머니는 청도 김씨 김경권(金景權)의 딸이다.
[활동 사항]
예대희(芮大僖)[1868∼1939]는 1898년부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1839∼1912]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송병선과 송병순 두 선생은 순국으로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이에 예대희는 망명을 결심하고 1912년 식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국권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청도 유림의 대응 방식은 순국이나 의병보다는 은둔과 망명·친일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 예대희는 망명을 택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예대희는 이승희(李承熙)[1847∼1916], 맹보순(孟輔淳)[1862∼1933] 등과 함께 국권 회복 방안을 논의했고, 이승희와 함께 공교회 운동에 참여하여 한인 공교회 지회를 설치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916년 귀국하여 공주 명암리(鳴岩里)에 정착하였고, 1939년에 생애를 마쳤다.
[학문과 저술]
예대희는 청도의 학자로는 특이하게 망명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작품에서 학자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지만, 나라를 잃은 망명객으로서의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심회(心懷)를 직설적으로 표출한 작품이 상당 부분 남아 있어 주목된다. 문집으로는 1940년에 간행된 석판본 『이산 문집(伊山文集)』 8권 4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