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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064
한자 一然
이칭/별칭 견명(見明),회연(晦然),원경충조(圓徑沖照),보각(普覺)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종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06년연표보기 - 일연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219년 - 일연 설악산 진전사에서 승려가 됨
활동 시기/일시 1227년 - 일연 선불장에 나아가 상상과에 합격
활동 시기/일시 1237년연표보기 - 일연 삼중 대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249년 - 일연 남해 정림사의 주지가 됨
활동 시기/일시 1256년연표보기 - 일연 륜산 길상암에서 『중편조동오위』 편찬
활동 시기/일시 1261년 - 일연 왕명으로 강화도의 선월사에 주석
활동 시기/일시 1268년연표보기 - 일연 운해사에서 대장경 낙성 법회를 열 때 주맹
활동 시기/일시 1274년연표보기 - 일연 인홍사를 중건함
활동 시기/일시 1277년연표보기 - 일연 왕명으로 운문사 주지가 됨
활동 시기/일시 1278년연표보기 - 일연 인흥사에서 『삼국유사』의 토대가 되는 『역대 연표』 간행
활동 시기/일시 1282년 - 일연 왕명으로 개경 광명사에 주석
활동 시기/일시 1283년 - 일연 국사에 책봉되고 호를 원경충조라 함
몰년 시기/일시 1289년연표보기 - 일연 인각사에서 입적
추모 시기/일시 매년 - 인각사에서 삼국유사 문화제 추모 행사가 열림
출생지 일연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활동지 진전사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활동지 보당암 - 대구광역시 달성군 비슬산
활동지 정림사 - 경상남도 남해군
활동지 오어사 - 경상북도 포항시 오천읍 항사리
활동지 인홍사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활동지 운문사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지도보기
활동지 광명사 -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활동지 인각사 -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북리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고려 후기 『삼국유사』의 저자로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했던 고승.

[개설]

일연(一然)[1206∼1289]은 1206년(희종 2) 6월 경주의 속현이던 장산군(章山郡)[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법명(法名)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으로, 뒤에 법명을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국사로 임명되면서 조정으로부터 원경충조(圓徑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입적 후 보각(普覺)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활동 사항]

어려서부터 세속 세계를 싫어했던 일연은 9세 때인 1214년(고종 1) 해양(海陽)[광주광역시]의 무량사(無量寺)로 찾아가서 밤새도록 단정하게 앉아 있곤 했다. 1219년(고종 6) 신라 말기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최초의 산문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도의(道義) 선사가 머물렀던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찾아갔다. 거기서 대웅 장로(大雄長老)로부터 머리를 깎고 득도(得度)한 다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일생동안 몸을 담았던 가지산문과 첫 인연을 맺었다. 한동안 진전사에 머무르던 일연은 선방을 떠돌아다니면서 참선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 무리들이 구산(九山) 사선(四選)의 우두머리로 추대하였으며, 1227년(고종 14)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 후 대구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에 머무르면서 참선을 하던 일연은 1236년(고종 23)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거처할 곳을 찾다가 무주암(無住庵)에 머물라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계시를 받고, 1237년 무주암으로 옮겼다. 거기서 ‘현상계(現象界)가 줄어들지도 않고 본체계(本體界)가 늘어나지도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는 말을 화두로 삼아 정진하다가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 이 해에 삼중 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246년(고종 33)에 선사(禪師)가 되었다.

1249년(고종 36) 상국(相國) 정안(鄭晏)이 세운 남해 정림사(定林寺)의 주지로 취임하였는데, 일연은 정림사에서 대장경의 간행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1256년(고종 43) 윤산(輪山) 길상암(吉祥庵)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를 편찬하였고, 1259년(고종 46)에는 대선사가 되었으며, 1260년(원종 1)에는 『중편조동오위』의 서문을 썼다.

1261년(원종 2)에 왕명을 받고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면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1264년(원종 5) 여러 번 요청한 끝에 남쪽으로 돌아와 오어사(吾魚社)에 머물다가, 얼마 후 만회(萬恢) 스님의 사양으로 비슬산 인홍사(仁弘社)의 주지가 되었는데,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1268년(원종 9) 운해사(雲海寺)에서 선종과 교종의 명망 있는 스님 100명을 모시고 대장경 낙성 법회를 열 때, 일연이 조정의 명을 받고 주맹(主盟)하였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정치계의 고위 인사들과도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폭넓게 교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권과의 교류는 중앙 정계로 정치적 터전을 넓혀 나가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1274년(원종 15) 비슬산에 있는 인홍사(仁弘社)를 확대 중건하고 조정에 보고하자, 원종은 절 이름을 인흥사(仁興寺)로 바꾸고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또한 일연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고 불일사(佛日寺)로 이름을 바꾼 뒤, 「불일 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1277년(충렬왕 3) 왕명을 받고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1281년까지 지내면서 현풍(玄風)을 크게 떨쳤다. 이때 왕은 일연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1278년(충렬왕 4) 인흥사에서 『삼국유사』 편찬의 토대가 된 것으로 생각되는 『역대 연표(歷代年表)』를 간행하였다.

1281년(충렬왕 7) 경주로 행차한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가서 법문을 설하여 크게 존경을 받았다. 이 때 일연은 경주에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충렬왕 8) 왕명을 받고 개경에 있는 대궐로 가서 법문을 했으며, 왕은 일연을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게 하고, 몸소 방문하여 법의 요체를 묻기도 했다.

1283년(충렬왕 9) 일연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국사(國師)에 책봉하고 호(號)를 원경충조(圓徑沖照)라 하였다. 같은 해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허락하고 근시(近侍) 좌랑(佐郞) 황수명(黃守命)에게 명령을 내려 호위하게 했다. 1284년(충렬왕 10) 어머니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일연이 머무를 곳으로 삼게 하고 100여 경(頃)의 토지를 하사했다. 인각사에 머물렀던 5년 동안 일연은 두 번에 걸쳐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전체 모임을 열었는데, 사찰의 성대함이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한다.

1289년(충렬왕 15) 7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평소처럼 제자들과 선문답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가 입적했는데, 향년은 84세, 법랍은 71세였다.

[사상과 저술]

일연의 일생 행적을 기록한 비문(碑文)에는 일연이 『어록(語錄)』 2권, 『게송 잡저(偈頌雜著)』 3권을 짓고,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 염송사원(禪門拈頌事菀)』 30권을 편찬하는 등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현재 전하는 것은 『중편조동오위』 2권뿐이다. 하지만 일연의 생애를 담은 비문이나 비문의 저서 목록에는 없는 『삼국유사』가 남아 있어서 일연의 사상의 대체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일연은 기본적으로 간화선(看話禪)에 바탕을 두면서도 조동선(曺洞禪)·운문선(雲門禪) 등 다른 계통의 선사상까지 탄력적으로 수용한 선종 계열의 사상가였다. 그러나 교학(敎學)과 유학(儒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삼국유사』에는 선종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불교 사상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일연의 사상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이들 사상의 상호 관계에 대한 구명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묘소]

만년을 보내다가 입적한 대구광역시 군위군의 인각사에 일연의 사리를 모신 부도인 ‘보각 국사 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보물 제428호]’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일연이 입적한 인각사에서 ‘삼국유사 문화제’ 등 다양한 추모 행사를 벌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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