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999 |
---|---|
한자 | 金大有 |
이칭/별칭 | 천우,삼족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출생 시기/일시 | 1479년 - 김대유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김대유 정시에 장원하여 진사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518년 - 김대유 전생서 직장에 서용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김대유 현량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김대유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 과제를 삭탈당함 |
활동 시기/일시 | 1545년 - 김대유 현량과 복과로 전적에 재서용됨 |
몰년 시기/일시 | 1551년 - 김대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45년 - 김대유 홍문관 응교로 추증 |
출생지 | 김대유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 마을 |
수학지 | 김대유 수학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 마을 |
묘소|단소 | 묘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산 |
사당|배향지 | 자계 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대표 관직 | 사간원 정언 |
[정의]
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신.
[개설]
김대유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무오사화로 삼촌 김일손이 화를 당했을 때 아버지 김준손과 함께 호남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났다. 이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칠원 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파방되자 삭탈 관직 당한 뒤, 청도의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佑), 호는 삼족당(三足堂). 아버지는 직제학 김준손(金駿孫)이고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다. 어머니는 첨정 고태익(高台翼)의 딸 제주 고씨이다.
[활동 사항]
김대유(金大有)[1479∼1551]는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 마을 출신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行誼) 있는 선비를 구할 때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정언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칠원 현감(漆原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 과제(科第)[등과한 자격]를 삭탈당하였다. 향리인 청도에 내려와 소요당 박하담과 더불어 사창인 동창(東倉)을 창설하여 구휼 사업에 매진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되면서 전적에 다시 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청도 운문산으로 되돌아 와서 여생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하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조광조·조식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저서로는 『탁영 연보(濯纓年譜)』가 있다.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산(金谷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 서원(紫溪書院)과 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