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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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應奎 |
이칭/별칭 | 중문(仲文),송간(松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에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황응규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569년(선조 2) 과거에 급제하여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를 비롯하여,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향에 은거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양곡을 내어 병사를 돕고, 향병 대장에 추대되어 의병을 모집하는 등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 할아버지는 황희성(黃希星)이고, 아버지는 우찬성 황사우(黃士祐)이며, 어머니는 영일 오씨(迎日吳氏)로, 오수정(吳壽楨)의 딸이다. 부인은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15세에 시집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황고(黃杲)이고, 둘째는 승정원 도승지를 지낸 황섬(黃暹)이며, 막내는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낸 황시(黃是)이다.
[활동 상황]
황응규(黃應奎)[1518∼1598]는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재주를 아낀 태학(太學)의 추천으로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에 제수되었고, 이어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569년(선조 2) 52세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임용되었고, 호조·형조·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76년(선조 9) 8월에 청도 군수로 부임하였다가 1579년(선조 12) 2월에 이임하였다. 황응규는 하인들을 다스릴 때는 매로 다그치지 않았고 부역을 공정히 해서 백성들이 즐거워하였다. 청도 향현(鄕賢) 김대유·박하담 등과 어울렸고, 부임 이듬해 동창에 세워졌던 선암 향현사(仙巖鄕賢祠)를 선암 서원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기문(記文)을 남겼고, 동시에 운수정(雲水亭)이라 불렀다.
1588년(선조 21)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늙음을 핑계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1594년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또한 향병 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의기를 고취시키고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으다가 1598년(선조 31)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주세붕(周世鵬)과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초서(草書)를 잘 썼다. 시(詩)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좋아했다. 저서로는 『송간고(松澗稿)』가 있다.
[묘소]
1598년(선조 31) 8월 20일에 옛 순흥(順興)[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서쪽 거묵동(去墨洞)에 있는 부인의 묘소 오른쪽에 묻혔다.
[상훈과 추모]
청도에 선정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