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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38
한자 衡平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형평사 청도 지부와 풍각 지부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28년 8월 - 청도 지부와 풍각 지부 해체, 군 단위 청도 형평 지부로 개편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8년 8월 10일 - 청도 형평 지부 임시 총회 개최
최초 설립지 형평사 청도 지부 - 경상북도 청도군
최초 설립지 형평사 풍각 지부 - 경상북도 청도군
성격 사회 운동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었던 조선 형평사 청도 지부가 전개한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

[개설]

형평 운동(衡平運動) 은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조선 형평사(朝鮮衡平社)가 전개한 백정(白丁)의 신분 해방 운동이다. 경상북도 청도군에서는 1923년 경 형평사 청도 지부(淸道支部)와 풍각 지부(豊角支部)가 설립되어 활동했다.

[역사적 배경]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신분제에서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당시 백정의 수는 형평사의 통계에 의하면 40여만 명이었고, 조선 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3만 3712명이었다.

백정들은 호적에 붉은 점이 찍혔고, 관공서나 학교에 서류를 제출할 때도 자신이 백정 출신임을 밝혀야 하고, 목욕탕, 이발소, 요리점 등의 출입 때 공공연하게 차별을 받았다. 백정에 대한 이런 불평등한 처우를 개선하고, 신분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백정들로 구성된 형평사가 조직되었다.

형평사는 1923년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처음 설립됐다. 이후 형평사는 백정 거주 지역을 방문하며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안내문 수천 장을 인쇄해 배포하는 등 백정의 권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벌였다.

조선 형평사는 1923년 5월부터 지사와 분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23년 12월까지 전국적으로 80여 지사와 분사를 설립하였고, 1926년 126개, 1930년 196개, 1934년 205개를 설립하여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형평 운동은 1935년 4월 24일 제13차 형평사 전국 대회에서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변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경상북도에는 대구 형평 지사[1923년 6월 설립], 경주 형평 분사[1923년 7월 설립], 상주 수평 동맹회[1923년 8월 설립], 예천 형평 분사[1923년 8월 설립], 영천 형평 분사[1924년 9월 설립] 등이 설립되어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도 지역에는 1923년 경 형평사 청도 지부(淸道支部)와 풍각 지부(豊角支部)가 설립되었다.

[경과]

1923년 형평사 청도 지부(淸道支部)와 풍각 지부(豊角支部)가 설립되었으나 거의 활동이 없었다. 1928년 8월 청도 지역에서도 분규가 발생함에 따라 청도 지부와 풍각 지부를 해체하고, 군 단위의 청도 형평 지부(淸道衡平支部)로 개편하였다. 이후 청도 형평 지부의 유지를 중심으로 조직의 갱신을 위해 1928년 8월 10일 청도 형평 지부 임시 총회를 개최하였다.

청도 구읍의 박득삼의 집에서 열린 임시 총회에는 서울에 있는 형평사 총 본부의 경북 순회 위원 강용생(姜龍生)과 이선동(李先同)이 참석하였고, 청도군내 각지에서 30여 명의 형평사 회원이 참석하였다.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열린 임시 총회는 이광동(李廣同) 의장의 사회와 강용생 경북 순회 위원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청도 지부와 풍각 지부를 해체할 것과 앞으로는 군(郡) 단위 조직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고 난 뒤, 선언·강령 및 규약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개선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청도 형평 지부의 개선된 임원은 위원장 박명선(朴明善), 후보에 김성오(金性五)가 선임되었다. ‘결의 사항’은 차별 대우 문제에 관한 건, 자체 교양에 관한 건, 분쟁 발생에 관한 건, 당 지부 유지에 관한 건, 총 본부 의연금(義捐金)에 관한 건, 풍각 도부(屠夫) 사건에 관한 건, 일반 사회 문제에 관한 건 등 7건이다.

[결과]

1920년대 중반부터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혁신파와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파의 대립으로 형평사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935년에는 단체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꿨고, 이후 대동사는 피혁 회사를 운영하는 등 사회 운동의 성격을 점차 잃어갔다. 그러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같이 해체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형평 운동 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협력해 민족 해방 운동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청도 지역에서도 백정의 신분 문제와 관련된 분규가 발생하여 형평사의 혁신을 위한 임시 총회가 개최되기도 했지만 형평사 청도 지부의 활동은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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