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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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孔巖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공암리는 중곡과 상리, 용방이 합해져서 형성된 마을이다. 운문댐 건설과 함께 경작지 대부분이 수몰되고 표고버섯 재배를 통해 생활하고 있다.
[명칭 유래]
구무바우[공암(孔巖)]가 있어 공암 또는 고암이라 하였다. 공암은 글자 그대로 구멍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이위면(二位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용암(龍巖), 공암(孔巖), 중리(中里), 상리(上里), 하신기(下新基), 하동경(下東京)을 합해서 공암동이라 하고 운문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공암동에서 공암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구룡산에서 흘러온 한줄기의 산등이 공암리에서 멈추고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라 공암 바위에서 감돌아 나가는 곳이 용암이다. 공암은 끝을 모른다고 해서 옛 지리지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굴이며, 공암 풍벽(孔巖楓壁)은 청도 팔경의 하나이다.
운문댐으로 마을 앞이 막혀 있고, 경작지는 대부분 운문댐에 수몰이 되었다. 산비탈에 일군 밭들은 대부분 한국 수자원 공사의 지원으로 표고버섯 재배지로 변해 있다.
지촌리로 가는 왼편 길 위 바위에 학가대(學稼臺)라는 각자가 있고, 그 아래는 농경지였으나 지금은 유휴지가 되어 있다. 원래는 이곳까지 운문댐 물이 찼지만 수위 조절로 물마루의 높이를 낮추면서 지금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 유휴지가 된 것이다.
[현황]
2012년 6월 현재 면적은 7.26㎢이며, 총 34가구에 72명[남자 31명, 여자 4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신원리, 서쪽은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 남쪽은 운문면 서지리, 북쪽은 운문면 지촌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리와 중리, 용방, 작은 용방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상리에만 주민이 살고, 다른 지역은 모두 수몰된 상태이다.
용방은 산의 끝머리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우라고 했는데, 음이 변하여 용방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계천 건너에 10여 가구가 살았는데 이곳을 작은 용방이라고 불렀다.
농경지가 없고 대부분 표고버섯을 재배하여 생활하고 있다. 청도에서 경주로 가는 국도 20호선이 지나고 있다. 중리 부근에 고인돌 7기가 전한다. 원래 10기가 있었는데 과수원을 만들 때 3기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서지에서 경주로 갈 때는 바위산 중허리를 넘어 다녔고 바위 사이로 난 길이라 해서 암도(巖道)라 했다. 여름에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에 푸른 산이 비쳐서 공암 창벽(孔巖蒼壁)이라 부르고, 가을엔 잡목에 아름다운 단풍이 물들어 공암 풍벽이라고 불린다.
공암이 있는 곳은 산이 불쑥 내민 곳으로, 깎아지른 암벽 높은 곳에 아이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다. 옛 문헌에 보면 옛날부터 이 지역을 지나던 사람들이 하도 신기해서 돌을 던져 보면 낭낭(朗朗)한 소리가 한참이나 들린다고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운문댐 축조 전에는 마을이 공암 남쪽에 있었다. 공암면사무소가 있었고, 마을 뒤에는 18세기에 사기그릇을 만들었던 가마도 있었다.
깎아지른 바위에 다섯 개의 시문이 각자(刻字)되어 있으나 완전한 판독은 불가능하다. 이 주변에는 풍호대(風呼臺)와 곡천대(曲川臺)라는 정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수몰로 인해 모두 없어졌다. 현재 공암리는 수몰로 인해 위쪽으로 옮겨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은 재사(齋舍)가 3곳이 있다. 마을 앞쪽에는 파평 윤씨들의 정자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허물어져 지금은 옛터만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위와 돌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옛날의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