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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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荇 |
영어공식명칭 | Yi Haeng |
이칭/별칭 | 택지(擇之),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478년 - 이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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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95년 - 이행 증광 문과 급제, 승문원 부정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04년 - 이행 충주에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513년 - 이행 성균관 사성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14년 - 이행 사섬시 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15년 - 이행 도승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17년 - 이행 대사헌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이행 홍문관 부제학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21년 - 이행 우찬성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24년 - 이행 이조 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27년 - 이행 우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30년 - 이행 좌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32년 - 이행 평안도 함종에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534년 - 이행 사망 |
유배|이배지 | 이행 유배지 - 충청북도 충주시 |
유배|이배지 | 이행 유배지 - 경상남도 거제시 |
유배|이배지 | 이행 유배지 - 평안도 함종 |
묘소|단소 | 이행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산78-1 장자동 ‘능안’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덕수(德水) |
대표 관직 | 좌의정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행(李荇)[1478~1534]은 연산군 때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중종 때 좌의정에 오른 문신이다. 16세기 전반기 요동치던 정국의 중심에 서서 많은 풍파를 겪었으며, 『성종실록』 편찬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제작에도 깊이 참여하였다. 또한 당진시 송산면에 회화나무를 심고 정착하여 송산면 덕수 이씨 세거지의 입향조가 되었다.
[가계]
이행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이다.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李抽), 아버지는 홍주 부사 이의무(李宜茂),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다.
[활동 사항]
이행은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예문관 검열과 봉교,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때 홍문관 교리에 올랐지만, 갑자사화(1504)에 연루되어 충주에 유배되었고, 1506년에는 거제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행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관직 생활을 이어갔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통해 촉망받는 관료로 인정받았다. 이행은 1513년(중종 8)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성으로 승진하였고,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다. 1515년에는 사간원 사간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하지만 조광조(趙光祖)의 배척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충청도 면천으로 내려갔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이행은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 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521년 공조 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으로 승진하였고, 1524년 이조 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 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마치고 좌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김안로의 반격으로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1534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자 이행은 복관되어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행의 저서로는 1589년에 발간된 7책의 목판본 시문집인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그 외에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문선』과 『삼강행실도』의 속편을 제작할 때도 관여하였다. 이행의 시는 당대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으며, 참신한 표현과 독특한 발상으로 높이 평가되어 박은과 함께 해동의 강서파(江西派)로 불렸다.
[묘소]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산78-1 장자동 ‘능안’에 이행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행의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행은 당진시 송산면에 세거지를 형성한 덕수 이씨의 입향조이다. 이행은 가문의 번영을 바라며 송산면 삼월리에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지금까지 번성하여 현재 당진군 천연기념물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후손들은 이행의 묘소를 송산면 도문리 능안 마을에 조성하고 매년 음력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제사를 지내며 덕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