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92 |
---|---|
한자 | 李安訥 |
영어공식명칭 | Yi Annul |
이칭/별칭 | 자민(子敏),동악(東岳),문혜(文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571년 - 이안눌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599년 - 이안눌 정시 문과 을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이안눌 예조 정랑, 이조 정랑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이안눌 예조 참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31년 - 이안눌 함경도 관찰사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이안눌 사망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이안눌 예조 판서 역임 |
출생지 | 이안눌 출생지 - 서울특별시 |
묘소|단소 | 이안눌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
사당|배향지 | 이안눌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
사당|배향지 | 향현사[동악 서원]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명산리 |
사당|배향지 | 구산 서원 -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덕수(德水) |
대표 관직 |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학문이 뛰어났고, 청렴한 관직 생활로 명성이 높았던 청백리였다. 이안눌의 학문은 조선 후기 동악 시단(東岳詩壇)을 구축할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관직은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현재 당진시에 거주하는 덕수 이씨 후손들은 묘소와 신도비를 관리하며 이안눌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가계]
이안눌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이행(李荇), 할아버지는 이원정(李元禎)이다. 아버지 진사공 이형(李炯)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이안눌은 1599년(선조 32)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601년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지냈다. 그해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7년 동래 부사, 1610년 담양 부사, 1613년 경주 부윤, 1615년 숭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한 후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였다. 1617년 예조 참의, 다음해 강화 부윤, 1622년에 부사과(副司果)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이안눌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등용되어 예조 참판에 올랐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을 방관했다는 3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1628년(인조 6) 방면되어 강화부 유수에 복직, 형조 참판을 거쳐 1631년(인조 9)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안눌은 1941년에 주청 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존(追尊)을 허락받아 원종(元宗)이란 시호를 받고 귀국한 공으로 예조 판서에 승진하였다. 1633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듬해 공청도(公淸道)[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안눌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병든 몸을 이끌고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637년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안눌은 한시의 대가였는데, 문집으로는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있다.
[묘소]
이안눌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안눌은 1636년(인조 14) 김상헌(金尙憲)·김덕함(金德諴)·김시양(金時讓)·성하종(成夏宗)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면천군[현 당진시 송산면 명산리]의 향현사(鄕賢祠)[동악 서원]와 담양의 구산(龜山) 서원에 제향되었다. 조정에서는 1663년(현종 4) 문혜(文惠)의 시호를 내렸다. 향현사는 대원군의 서원 정리로 철폐되었고, 1712년(숙종 38)에 묘소 옆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