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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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年-恨-壬辰山戰鬪 |
영어음역 | Imjinnyeonui Hani Seorin Imjinsan Jeontu |
영어의미역 | Imjinsan Battle, Tragedy of the Imjin Year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성환 |
[개설]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임진산성은 원래 임진산의 정상, 곧 수지구 풍덕천동 산 37번지와 기흥구 보정동 산 82-2번지 일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임진산성지·풍덕천동성지·예진산성지 등으로도 불리는 임진산성은 조선 중기와 후기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성이기도 한데, 이는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임진산성과 광교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탄환이 장착된 총통]
1997년 4월 30일 수지구 풍덕천동에 있는 임진산의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2기의 총통이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발견된 총통은 유통식(有筒式) 현자총통(玄字銃筒)으로, 전체 길이는 78.5㎝, 무게는 43.7㎏이나 되었다. 몸통은 일곱 마디의 죽절(竹節)과 같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통장(筒長)은 63.8㎝, 약실(藥室)은 14.7㎝, 약실의 외경은 11.8×14㎝, 통구(筒口)의 외경은 11.9×12.5㎝, 내경은 6.9×6.7㎝였다.
거금(擧金)은 약실과 포구(砲口) 사이 셋째와 다섯째 죽절 사이에 꺽쇠형으로 조성되었으며, 크기는 길이 11.9㎝, 높이 6.2㎝, 두께 1.6㎝였다. 약실은 몸체보다 지름이 약간 크고, 선혈(線穴)은 포미(砲尾)에서 7.5㎝ 되는 곳에 뚫려 있었으며, 포미는 폭 1.1㎝로 한 단이 지고 원형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몸체는 포미에서 7조(條)를 이루며 조금씩 좁아지다 포구 5.4㎝ 앞에서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었다.
특히 몸통 내부에는 포구에서 57.4㎝ 되는 곳에 탄환이 장착되어 있어 긴박했던 당시의 전황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왜 탄환이 장착된 채 그대로 버려졌을까? 적진에 발사하기 위해 탄환을 장착했으나 오히려 습격을 당해 장렬하게 전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탄환이 제대로 발사되었더라면 당시의 전황이 역전되지는 않았을까?
[임진산에 오르다]
임진산의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실시된 긴급조사는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1997년 6월 4일부터 7월 10일까지 한 달 조금 넘게 이루어졌다. 물론 조사 시점부터 북동쪽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벌목이 이루어져, 이를 옮기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다른 공사들 역시 상당 부분 진행되어 지형 변경이 끝났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는 알 수 없었다.
현장 조사에서는 먼저 유적 일대에 대한 지표 조사부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동쪽과 남쪽 경사면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채집되었다. 조사의 기준점은 해발 129.2m의 구릉 정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조사 지역 안에 동서 5m, 남북 10m 길이의 트랜치(Trench)을 설치했다. 이와 더불어 이미 노출되어 있던 남서쪽과 북동쪽 절개부의 단면을 조사하여 토층(土層)의 흐름과 문화층(文化層)이 존재할 가능성도 탐색하면서 총통이 출토된 북서쪽에 대한 조사를 병행했다.
트랜치 조사는 기준점을 중심으로 서쪽 방향으로 4개를 구획하고 폭 2m의 피트를 정해 흙을 걷어내는 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지역이 중장비에 의해 풍화암반층까지 교란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일부 지역에서 부식토층 아래에 두께 20~30㎝ 정도의 암적갈색 점질토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각종 철제 유물을 비롯해 자기류 등이 안정적으로 출토되었다.
정상부의 트랜치를 북쪽과 동쪽·서쪽 방향으로 확장 조사하여, 지름 80㎝ 정도 크기로 이루어진 원형의 저장공(貯藏孔)과 총통이 출토된 부근에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또 북동쪽 절개부에서는 역시 민무늬토기 조각과 타날무늬토기 조각, 목탄층이 출토되어 이곳이 집터일 가능성도 제기되었고, 그 주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가 쌓여 있는 문화층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조사 결과 이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집터와 조선시대 토성 벽 일부, 저장공 1기, 소형 유구 2기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백제시대의 집터에서 타날문토기류가 발견되었고, 조선시대 토성 벽에서는 자기류와 철제류가, 저장공에서는 기와류와 철환 등이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들로 미루어 임진산은 청동기시대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유적이 형성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철제 유물 106점 중 철제탄환 4점, 철모 6점, 철도(鐵刀) 3점, 철칼집편 6점, 철촉 43점 등의 무기류와 함께 발견된 조선시대 성벽의 존재는 총통과 함께 임진산에서의 전투와 관련된 직접적인 유물과 유적으로 판단되었다.
아울러 광주분원에서 생산된 상품 백자인 ‘천(天)’자 명의 백자와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製)’·‘장춘가기(長春佳器)’ 명의 중국 경덕진 민요에서 생산된 청화백자편의 존재 역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유물들은 임진산성이 일시적인 목적을 위한 보루라기보다는 이 일대의 관방체계 아래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유적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옛 기록에 나오는 임진산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임진산성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기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하여 정사(正史) 어디에서도 임진산성과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하여 18세기 중엽부터 몇 차례에 걸쳐 간행된 용인 관련 읍지인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나 『용인군지도읍지(龍仁郡地圖邑誌)』 등에서도 임진산성에 대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용인과 관련한 읍지류에는 대부분 성지(城池)나 전진유지(戰陣遺址)·진보(鎭堡) 등에 대한 항목이 설정되어 있는데, 이들 항목에서조차 임진산성과 관련한 부분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과연 당시 사람들에게조차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임진산에서의 기억이 망실되었던 것인가?
이에 비해 최근의 기록에서는, 지극히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임진산성과 관련한 내용이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는 현재 분당선 전철의 마지막 역이 있는 읍삼면 보정리와 현재의 수지구 풍덕천동인 수지면 풍덕천리에 위치해 있는 보루를 주목하여, “구릉을 고른 것으로 주위는 약 50칸이다. 풍덕천진지(豊德川陣址)라고 칭하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것”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의 이 기록은 이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국유적목록』(1971)·『문화유적총람』(1977)·『한국의 성곽과 봉수』(1989)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이들 기록에서 공통적인 내용은 임진산성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진지로서, 축성의 주체가 조선군이 아닌 일본군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백여 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에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서 왜루(倭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동국여지지』 용인현의 「고적(古蹟)」에, “왜루는 용인현의 읍치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큰길 위의 산기슭에 있는데,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구가 연이어 주둔했던 곳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동국여지지』에서는 왜루를 주목하고 있지만 이곳 임진산에서의 전투 상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는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용인현의 관아가 있던 곳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일본군들이 주둔했던 왜루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곳이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이야기하는 풍덕천진지일 것이다.
반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이때 일본군과의 전투와 관련하여 임진산 일대의 성보(城堡)로 문소산진(文小山陣)과 북두문산성(北斗門山城)에 대한 기록과 그 전황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또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문소산진과 북두문산성 두 곳 중 한 곳이 임진산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곳이 총통이 묻혔던 임진산일까?
수지구 상현동과 기흥구 보정동 사이에는 해발 188m 정도의 산이 있다. 2기의 총통이 발견된 곳 역시 이 산자락이다. 이 산의 이름은 소실봉(紹室峯)인데, 원래의 이름은 문소산이었다고 한다. 문소산이 언제 소실봉으로 바뀌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산의 북쪽으로 두 계곡이 있는데 하나는 작은 문소골이요, 다른 하나는 큰 문소골이라고 한다.
문소산의 유래는 이곳에 있었다고 하는 문수사에서 따온 듯하다. 문수사의 흔적은 문소골 왼쪽 계곡에 있는, 절에서 경작하던 전답이라는 의미의 ‘중느골’이라는 지명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또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이전 상현동에 있는 뜰을 ‘병량(兵糧)뜰’이라고 했다거나, 풍덕천의 유래 중 하나가 물이 깊어 명주 한 필이 다 들어갔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풍덩풍덩 빠져죽어 풍덩내(內)라고 하던 것이 현재의 이름으로 되었다고 하는 데서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전투의 상황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면 그 지명조차 풍덩내로 바뀌었을까!
[일본군과의 전투! 누가 승리하였나?]
1592년(선조 25)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 일본군은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직후 동래성을 거쳐 파죽지세로 북상한다. 보름여 만에 충주에서 삼도순변사 신립(申砬)마저 패하자 4월 29일 조정은 몽진을 결정하고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신각(申恪)으로 하여금 한강을 방어하게 하고, 이성중(李誠中)·정윤복(丁胤福)을 좌·우통어사로 삼아 한양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충주에서의 승전 후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기 위해 지체없이 북상했는데, 용인은 이때 죽산과 양지를 거쳐 한양에 당도하려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이 한양으로 입성하자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등지의 삼도 근왕병(勤王兵) 5~6만 명은 용인과 수원 일대에 주둔하여 일본군과 대치를 한다. 삼도 근왕병은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방어사 곽영(郭嶸), 조방장 이지시(李之時)·백광언(白光彦), 충청도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방어사 이옥(李沃), 절도사 신익(申翌), 경상도관찰사 김수(金晬)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이밖에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과 광주목사 권율(權慄)이 이끌던 군사들도 한양이 함락되자 수원 남쪽의 독산성(禿山城)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군 또한 한양과 충주 지역의 교통로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인 목적에서 죽산·양지·용인 일대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삼도 근왕병과의 결전은 불가피했다. 이에 일본군은 주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끌던 1,600여 명의 수군 중 주력 천여 명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600여 명은 와키자카와 와타나베[渡邊] 등에게 이끌게 하여 용인의 북두문산과 문소산 등에 소루(小壘)를 구축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o1592년 5월 26일: 삼도 근왕병(勤王兵)이 진위(振威) 들판에 모이니 무릇 13만이었다. 깃발은 해를 가리고 군량 운반은 백여 리에 뻗쳤다. 경기·충청도 피난민들은 이 군사를 잘못 믿고 돌아와서 모여든 사람도 더러 있었다.
o1592년 6월 3일: 수원 독성(禿城)에 옮겨 주둔하니 수원의 적은 대군이 갑자기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나 용인의 적과 합쳤다. 이광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에 가서 적을 정탐케 하였더니, 적이 현(縣)의 북쪽 문소산에 진을 치고 있는데 기세가 약해 보였다. 광언이 얕잡아 보고 돌아와 “엉성한 군사들이니 급히 쳐서 때를 놓치지 맙시다”라고 복명하였다.
중위장 광주목사 권율이 극력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大賊)이 눈앞에 있습니다. 지금 공은 도내를 쓸어 모병하여 들어와 나라를 구원코자 하는데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 거사에 있으니 지중하여 만전책(萬全策)을 도모할 것이며, 소수의 적들과 칼날을 다툴 것이 아니라 오직 바로 조강(祖江)[임진강과 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하며 극력 말렸다.
그러나 이광이 듣지 않고 조방장 이지시와 선봉 수령들을 백광언에게 소속시키고 적이 금방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하여 육박전으로 묘시(05~07시)부터 사시(09~11시)까지 도전하여도 적이 나오지 않았다. 오시(11~13시)가 되자 아군은 기운이 풀렸다. 적이 풀 속으로 기어 들어와서 군중에 들어와 좌우에 베고 찍으니, 지시·광언과 고부군수 이윤인(李允仁)·함열 현감 정연(鄭淵) 등이 모두 피살되고 대군이 사기가 빠졌다.
o1592년 6월 5일: 일설에는 곽영이 먼저 광언을 보내어 도로를 보고 오게 하였더니 돌아와 말하기를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해서 쉽게 진격할 수 없다고 하니, 광이 이전의 원한을 가지고 군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심하게 쳐서 거의 죽게 되었다. 광언이 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적에게 죽겠다”고 하고 상처 부위를 싸매고 일어나 지시와 더불어 나가서 적에게 직접 육박하여 싸우다가 죽었다.(『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이때에 지시·광언이 각각 정병 1천을 거느리고 적을 아주 가볍게 여기기에 권율이 경계하기를 “경솔히 진격하지 말고 중위군 권율의 군사가 가기를 기다려 싸우라” 하였더니 권율이 도착하기 전에 광언 등이 경솔하게 나아갔다가 패해서 죽었다.
당초에 이광이 근왕하러 달려갈 뜻이 없었는데 조방장 광언이 이광을 보고 “임금께서 파천하셨으니, 신하가 되어 당연히 몸을 빼서 달려가야 할 것이거늘 공이 손에 큰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퇴각하고 움츠려 나아가지 않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고 칼을 뽑아들고 눈을 부릅떴다. 광이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말하기를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한 탓이니 이 뒤에는 공의 지시대로 하겠소”라고 하고 비로소 다시 군사를 소집했던 것인데, 이때 이광이 그 감정을 갖고 광언을 시켜 용인의 적을 치게 했던 것이다.
o1592년 6월 6일: 이광 등의 군사가 행진해서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치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적의 기병이 갑자기 덤벼들었다. 먼저 온 적 다섯은 쇠로 만든 탈을 쓰고 백마를 타고 백기를 갖고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신익이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먼저 무너지니 10만 장사가 한꺼번에 흩어지는 소리가 마치 산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적의 기병 두어 명이 10리나 쫓아오다가 갔다. 이광 등이 교서(敎書)·인부(印符)·기(旗)·군기·군량 등을 버려서 길이 막혔는데 적이 모두 불태웠다.
대군이 모두 무너지자 이광은 전주로 돌아가고 윤국형은 공주로 돌아가고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다.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黃進)은 군사를 손상없이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 이때 충청·경상 두 도는 모두 다 적의 분탕질을 당했으나 전라도 한 지방만은 물력(物力)이 전성(全盛)하여 군기·갑옷·치중(輜重)이 40~50리에 가득 찼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듣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고 조정에서도 역시 날짜를 세며 첩보를 기다렸다.
김수는 군사를 잃고 패전한 끝에 겨우 군관 백여 명을 거느리고 광에게 붙었으니 광이 거느린 정용병(精勇兵)들은 김수 일행을 모두 멸시하고 업신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은 또 용렬하고 겁이 많아 병법을 알지 못하고 행군하기를 마치 양(羊)을 몰고 다니듯하니 규율이 문란해서 통제가 없고 앞 군사와 뒤 군사는 서로 알지도 못하였다.
처음에 광언·지시가 광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비록 많다 하나 모두 여러 고을에서 모은 오합지졸이니 병력의 많음과 적음을 논하지 말고 모두 그 고을 수령을 장수로 삼아 어느 고을은 선봉을 하고 어느 고을은 중군을 시켜 한 곳에 모이지 말고 10여 둔으로 나누어 있으면 한 진이 비록 패하더라도 곁에 있는 진이 계속해 들어가서 차례차례 서로 구원하게 되니 이긴다면 반드시 완전히 이길 것이고, 패하더라도 전부가 패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나 이광이 듣지 않고 용인현 남쪽 10리에 나아가 진을 쳤다.
광언·지시가 바로 적의 진터까지 달려들어 나무하고 물긷는 적병 10여 급을 베어 오니 모든 군사들이 적을 가볍게 여기고 교만한 기색을 보였다. 밤이 되어 광언 등을 시켜 적의 진을 기습하여 울타리를 넘어 바로 들어가 칼을 휘두르고 마구 찍어 머리 10여 개를 베었으나 마침 짙은 안개가 꽉 차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진중에 있던 적이 모두 언덕에 올라 안개를 이용해서 총을 쏘고 뒤에서 엄습하니 광언 등이 모두 죽고 날이 새고 안개가 걷히자 적의 군사 4~5천이 우리 진과 서로 2~3리 거리에서 대치하여 적의 총소리가 한 번 나자 우리 대군은 마침내 무너졌다. 이광 등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계속해 달아나고 8만 군사가 잠깐 동안에 모두 흩어졌다. 패전한 소식이 행재소에 들어오니 상하가 서로 쳐다보며 한숨과 탄식만 내뿜을 뿐이었다.(『기재잡기』·『연려실기술』 권15, 「삼도근왕병용인패적(三道勤王兵龍仁敗敵)」)
임진산에서의 본격적인 전투는 6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순찰사 이광의 지휘 아래 선봉장 백광언이 북두문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기도 했지만, 문소산으로 후퇴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조방장 이지시와 백광언이 전사하면서 대패를 했다. 이에 조선군은 광교산으로 후퇴하여 이광의 본진과 합쳐 진영을 정비하고자 했으나, 이튿날 와키자키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으로 대패하여 이후 용인 일대는 일본군의 수중에 넘어가 그 피해가 극심하게 되었다. 임진산에 조선군의 한(恨)이 묻힌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역사의 현장! 지금은 어디에……]
그렇다면 임진산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군이 쌓은 보루가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쌓은 보루라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럴까? 당시 일본군은 수원을 중심으로 반격 태세를 가하려는 조선군에 방어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높지 않은 구릉이지만, 이를 중심으로 동서로 뜰을 이루고 있는 문소산은 광교산에서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을 방비하고,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훤히 꿰뚫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루를 쌓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임진산성은 한양과 충주 지역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 전기부터 축성되었던 전략적인 보루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유적과, 특히 조선 전기에 생산된 백자편과 중국 경덕진 민요에서 생산된 청화백자편의 존재가 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곳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왜루였다는 『동국여지지』의 기록은 그 성격을 충분하게 기록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임진산 일대의, 특히 광교산과 연결되는 관방 체계 아래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보루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급작스레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른 이곳을 탈환하기 위한 조선군의 노력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의 전투 끝에 문소산진과 임진산은 조선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그동안 일본군에게 밀리던 이곳의 전황이 급작스러운 반전을 보이게 되었고, 조선군은 일본군의 반격에 대비해 보루를 수축하며 앞으로 치러질 전투에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일본군의 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장전했던 탄환도 다 써보지 못한 채 패전하여 다시 광교산으로 물러났을 것이다. 임진산에서의 전투, 그리고 그 역사 현장에서 발견된 2기의 총통은 그런 사정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