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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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允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종길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개설]
성윤문(成允文)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수군절도사와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여수 지역에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노(廷老), 호는 만휴(晩休). 아버지는 판서 성효원(成效元)이다.
[활동 사항]
성윤문은 1542년(중종 37) 순천부 해룡면 소안리[현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1년(선조 24) 갑산부사로 부임하였다. 다음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함경도병마절도사 이영이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함흥을 점령한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황초령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과감한 공격을 시도하지 못해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594년(선조 27)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쓴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1596년(선조 29)과 1597년 성윤문은 미조첨사로 재임하였고, 이순신과 자주 전술 회의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진주목사를 거쳐 정유재란 때는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경상도 해안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598년 8월 생포한 왜적을 심문한 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병이 중하며, 부산과 동래, 서생포의 왜적이 장차 철수할 계획임을 조정에 알려 이를 대비케 하였다. 또 11월에는 다시 생포한 왜병으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7월 초 이미 병사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대장이 되어 국사를 장악했으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곧 귀국하기로 되어 있어 그를 데려가기 위해 빈 배 50척이 와서 행장을 꾸리는데 군량과 전마 3분의 1을 이미 배에 실었다.”라는 내용의 정보를 조정에 알리는 한편, 일주일 후에 있을 노량해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1599년(선조 32)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지형이 돌출되어 방어하기 어려운 성산진을 수산으로 옮겼다. 제주성을 5척이나 높였으며 격대와 포대 21개소를 만들었다. 또한 조천관을 중수하고 쌍벽정을 연북정이라 고쳐 불렀다. 1601년(선조 34) 왜적에 대비하고자 제주 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성을 쌓고 건물을 지어 원성이 컸다. 이 때문에 길운절 반란(吉云節 反亂)도 일어났고 소덕유(蘇德裕)의 난까지 발생하였다. 그해 6월 수원부사로 전출되었다가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04년(선조 37)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다가 수원부사 겸 방어사로 교체되었고, 곧 파직되었다. 당시 성윤문의 나이는 66세였다.
성윤문은 성격이 곧고 결백하여 가는 곳마다 죄인들에게는 추상같은 형벌을 집행하여 원한을 샀고,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창녕성씨족보』에는 성윤문이 1629년(인조 7) 1월 1일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성윤문 묘소는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대안리 소안마을 호암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