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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3041
한자 安潚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인
성별 남자
본관 죽산
대표관직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정의]

순조 때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거북선 복원과 구휼 ·제민에 힘썼던 인물.

[가계]

가계와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는 성숙(聖淑)이요, 본관은 죽산이다.

[활동사항]

안숙(安潚)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과 여수 연등동에 세워진 사적비 비문으로서 알 수 있다. 안숙은 행수선전관(行首宣傳官)을 거쳐 1797년(정조 21) 8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바로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1808년(순조 8) 11월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1809년 1월에 여수에 부임한다.

안 수사는 부임하자마자 헐어져 가는 좌수영부터 손을 댔다. 군기(軍器)와 집물(什物)을 보충하고 파손된 성첩과 관사를 완벽히 쌓거나 중수했다. 못쓰게 된 본영 거북선을 충무공이 만들었던 규격으로 다시 제작하였다. 이 때의 재원을 통영과 각 수영 및 충청남북 방어영이 다 이 배 모양을 그려 갔다고 한다. 또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발간한 병학지남(兵學指南) 오십여 권을 인쇄하여 예하에 나누어 주고 활쏘기 대회의 상품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틈틈이 무사들을 모아 병법을 강론하고 궁술을 연습시켰다.

그러나 그해 가을 심한 가뭄 때문에 곡식은 한 톨도 수학할 수 없었다. 안 수사는 동짓달이 되자 감관(監官)을 골골마다 보내 영민들의 형편을 조사하고 본영에서 마련한 것에다 관찰사가 보낸 것까지 합해 곧바로 형편에 맞게 분배했다. 또, 걸식하는 자의 막사를 따로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영내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나누어 주고 그곳을 떠나 갈 때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의복과 농기구를 주었다.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 주었고 석창(石倉)에서 거두어들인 환곡의 폐단도 없앴다.

1810년(순조 10) 7월, 여수를 이임한 후에 1813년(순조 13)에는 함경북도 절도사로, 1815년(순조 15)에는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나갔다.

[상훈과 추모]

여수 사람들은 안 수사가 떠난 뒤 그에 대한 고마움과 치적을 담은 사적비를 여수시 연등동에 세웠다. “절도사 안숙사적비(節度使安潚事蹟碑)”이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6.04 한자 항목명 수정 숙(橚)을 숙(潚)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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