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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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晬光 |
영어음역 | Yi Sugwang |
이칭/별칭 | 윤경(潤卿),지봉(芝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이수광은 태종의 7세손으로 왕손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이희검(李希儉)이다.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조선 전기 청백리 하정(夏亭) 유관(柳寬)의 5세손이다.
[활동사항]
이수광은 1563년(명종 18) 2월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당대의 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칭송을 받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16세에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20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했고, 23세인 1585년(선조 18)에 별시 문과에 들어 본격적으로 벼슬길로 접어들었는데, 30세 이전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을 다녀오기도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에는 경상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하고서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使)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반민(叛民)을 선유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 이수광은 진위사(陳慰使)의 임무를 띠고 두 번째로 중국에 다녀오고, 1611년(광해군 3)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청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3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수광의 순탄했던 관로는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크게 바뀐다. 특히,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인목대비 폐비사건은 이수광을 동대문 밖 자택으로 숨어들게 했다. 이때 백과사전이나 다름없는 저 유명한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하여 중국을 왕래하며 얻은 천주교와 서양 문물 등 새로운 사실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당시 주자학적 세계관을 지녔던 백성에게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전라남도 여수 지역과의 인연은, 1616년(광해군 8) 이수광의 나이 54세가 되어 순천부사로 임명되고서부터이다. 순천부사로 부임한 직후 이수광은 관내 구석구석을 순회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임진왜란의 참화가 그대로 남아 있던 전라좌수영과 충민사 등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1619년(광해군 11) 3월에는 순천부사를 그만두고는 수원의 시골집과 서울의 본가를 오가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채신잡록(采薪雜錄)』 등 많은 저술을 내놓게 되었으며, 무실(務實)을 강조했던 이수광의 실학사상이 정리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겸홍문관제학(都承旨兼弘文館提學)으로 임명되고 대사간과 이조참판,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인조 임금을 공주와 강화(江華)로 두 번이나 모시는 비운의 역할도 담당하기도 했다. 이수광은 1628년(인조 6) 이조판서에 오른 뒤 그 해 12월 6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내우외환의 정치적 격변기에도 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일관, 양식 있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명(明)나라를 수차례 방문하여 사신으로서의 소임을 수행하는 한편,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 『속이담(續耳潭)』 등을 가지고 들어와 1614년(광해군 6)에 『지봉유설』을 간행하여 조선 사회에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등 실학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수광의 학문 경향의 특징은 유교적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주자학 기본문제에 뛰어들기보다는 구체적인 무실을 강조하는 실학적 정신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저술 및 작품]
주요 저서로는 『지봉유설』, 『지봉집』, 『채신잡록』 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지지사(地誌史)의 연구 대상이 되는 『승평지(昇平志)』를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승평지』에는 이수광이 순천부사로 근무하면서 여수 지역을 자주 드나들면서 보았던 내용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여수 지역에 대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충무공을 회상하며」, 「충민사용전운」, 「영당」 등이 있다. 그중 「영당」이 주목할 만하다.
“지세는 남쪽 끝에 연해 있는데/ 해는 동쪽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네/ 좌수영 앞엔 외로운 섬 하나/ 예나 지금이나 바람만 부는구나/ 관문을 지키는 일이 그리 중한데/ 단청 칠한 바닷가 영당이 외롭구나/ 슬프다, 통제사 이 장군이여/ 천년토록 그 공덕을 읊고 또 읊으리.(地勢連南極 雄臨日出東 孤城前左水 一島古今風 控禦開防重 丹靑海廟空 哀哉李統制 千載誦奇功)”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번지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문간(文簡)의 시호를 받았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는 이수광을 평하여 “몸가짐이 바로 잡혀 성색(聲色)과 헛된 가식을 싫어하였으며, 44년간 벼슬하는 동안 출처언행에 있어서 조금도 티가 없는 인물이었다.”라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