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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434
한자 政治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율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시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공적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에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제반 활동

[개설]

권력이 집중된 중앙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지방의 정치는 크게 영향을 받았다. 장기 집권을 위한 독재 정치, 4·19혁명, 과도정부, 5·16 군사혁명, 6·29선언, 군사 정변, 대통령 단임제, 10월 유신, 문민정부 등의 변화에서 지방은 합리화를 시키는 정치에 머물렀다. 따라서 중앙 정치의 동향을 모르고 지방정치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민정부 시절 제1회 동시 지방 선거가 실시되면서 지방을 위한 정치 형태가 이루어졌고, 주민을 위한 정치를 발전시켜나가기 위하여 중앙정치의 역정을 인용했다.

[제1공화국(1948.7~1960.4)]

1.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UN 결의에 따라 제1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제헌국회는 총 48개 정당과 단체가 참여하였지만, 선거 결과 무소속이 85석, 한독립촉성 국민회가 55석, 한국 민주당이 29석, 대동 청년단이 12석, 조선민족청년단이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이 2석, 대한노동총연맹이 1석 그리고 기타 단체가 10석을 차지한다. 당선자가 없는 당과 단체만도 31개에 달했다.

제헌 의회는 5월 31일 개원하였고 7월 17일에는 새 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했다.

1948년 8월 15일 헌법에 근거하여 새 정부의 수립이 선포됨으로써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은 종식되고 대한민국이 출범한 것이다.

여수는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제8선거구(여수군 갑)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김문평을, 제9선거구[여수군 을]에서 무소속 황병규를 선출했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제1대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다. 국회의원 198명 중 197명이 출석, 헌법 제53조에 의해 국회 간접선거로 실시되었다.

2. 여순사건 발생

제1공화국 출범 3개월인 1948년 10월 20일 여순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2월 7일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이른바 '2·7 구국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48년 2월 26일 유엔 임시총회에서 미국 측의 '가능지역 총선거 안'이 가결, 남한은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5월 10일 단독으로 1948년 4월 3일 총선거를 치르기로 했고, 이에 반대하여 제주 4·3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이 진압 개시했으며 1948년 5월 4일 현지 모집 인원과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 800여 명으로 여수 14연대를 창설하고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중 1개 대대를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시켰다. 이에 반발하는 일부 세력이 부대를 장악, 1948년 10월 20일 여수 읍내로 진격, 관공서와 주요기관 점거하고 장악하고 경찰, 고위공무원, 우익정당, 사회단체 요인, 대동청년단 등을 반동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이날 정오에는 중앙동 로터리에서 약 500명이 모여 인민해방군 환영 시민 궐기대회도 열렸다.

10월 21일에는 순천, 구례, 보성, 남원을 장악. 정부는 광주에 반란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탈환에 나섰다. 1948년 10월 24일 정부군에 의해 여수 전역을 탈환했다.

탈환 후 진압군과 경찰은 수복 후 진압군은 40세 미만 남자들은 가담 혐의가 있을 것으로 여겨 학교, 공한지 등에 억류시키고 가담자 색출에 나섰고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학살되기도 해 아비규환이었다. 28일 오후부터는 억류했던 시민을 귀가시켰다. 12월 중순까지 약 40일 동안 가담자 색출로 여수는 공포시대가 계속됐다.

문균[회장], 정재완[부회장], 정경수[총무부장], 박홍근[재정부장], 장기[선전부장] 등 당시의 지방 유지들은 여수 부흥기성회를 결성하고 진압군을 도우면서 사태를 수습하고 중앙 당국을 움직여 많은 구호자금을 타 오기 위한 활동을 하여 긴급구호금 1억 8천5백만 원 무상원조, 장기저리자금 22억 5천만 원이 배정됐다.

1948년 12월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 정책을 실시하고, 학교에는 학도 호국단을 만들어 학생들에게도 반공 교육과 군사 훈련을 받게 하였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피해에 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확인되며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000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후유증은 심각했다. 양 진영의 탄압과 학살로 무고한 양민이 수없이 희생되었고 사건 후 결사(結社)를 기피 하는 경향이 뚜렷하여지면서 이웃을 잃어갔으며 연좌제마저 지역의 인재고갈을 부추겼다.

시읍면 의원 면장, 도의원 국회의원 등 선출직 선거에서 특정인이 자리만 바꿔 도전하여 성공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는 여순 사건으로 인한 많은 희생으로 인재 빈곤이 불러온 참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정재완의 국회의원 4선, 황병규의 제헌 의원, 참의원, 시장 등 상당수의 인물이 선출직 3~4선 사례가 많았던 것을 그 증표로 보는 시각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사건 후 장기간 집안에서 공직 진출을 반대하는 사례가 빈번했으나 70년대 이후에야 공직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3. 국회의원 선거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제3선거구[여수시]는 무소속인 정재완[신문사장]이 제29선거구[여천군]는 대한국민당 황병규가 당선되었다.

전국적으로는 여권의 참패로 안정석 확보가 불가 해졌다. 정재완이 제2대, 제3대 무소속으로 4대, 5대 민주당으로 의원으로 4선을 달성, 여수가 야도(野都)라는 지칭을 받기도 했다.

4. 지방선거

1952년 4월 25일 헌법에 보장된 첫 시, 읍, 면 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초대 시의원 선거에서 김정식[무], 정주양[자], 하동호[자], 박형규[무], 문균[자], 강대헌[자], 강정수[자], 최대순[자], 정우수경[자], 박두만[무], 김금동[자], 김옥두[무], 장기[자], 이기조[무], 심인구[자], 주정태[무], 임영도[자], 남병일[자], 임선봉[자], 박학래([자], 윤규봉[무], 서금암[자] 등 22명이 당선됐다. 22석 중, 장기 시장전출, 정주양이 부시장 전출로 자유당이 13석, 무소속 7석으로 의회를 구성했다.

지자체 단체장은 시읍면 의회에서 선출 하도록 했다. 여수시장 선출에서 무소속 김정식과 자유당 장기가 대결하였으며, 경찰의 압력에 의해 자유당의 장기가 시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지방 정치는 집권당의 향배 따라 막중한 영향을 주던 시절이었다.

1952년 4월 10일 초대 도의원에는 여수시 김봉채[민], 여천군 박재규[자], 서일선[자]이 당선됐다.

5. 대통령선거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은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포위한 가운데 발췌 개헌안을 기립 표결로 통과시키고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대통령 후보는 조봉암[무소속], 이승만[자유당], 이시영[무소속], 신흥우[무소속] 등으로 이승만이 득표율 74.6%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투표율은 88.1%였다.

6. 국회의원 선거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여수시[제3선거구] 무소속 정재완이 여천군[제12선거구]에서는 무소속 김철주가 당선됐다. 정재완이 제2대, 제3대 무소속으로 4대, 5대 민주당으로 의원으로 4선을 달성, 여수가 야도(野都)라는 지칭을 받는데 한몫을 했다.

7. 지방선거

1955년 6월 21일 제2대 시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김정식[민], 정만수[자], 허권[민], 정석영[자], 배말암[자], 하동호[자], 강정수[자], 김안식[자], 최대순[자], 박종석[무], 문형순[자], 이기조[무], 곽채용[자], 심인구[자], 노준용[자], 남병일[자], 박학래[자], 임선봉[자], 윤규봉[자], 이철수[민]를 선출하였다. 총 20석 중 자유당 16석 민주당 2석, 무소속 2석으로 의회를 구성했다.

1955년 6월 22일 여수시 의회 제28회 임시회 제2차 본 회의에서 이기조 의원 외 12명으로부터 정주양 시장에 대한 불신임안 결의안이 제기되어 14명 중 11대 2로 가결되었다.

정주양 시장[1953.9~1955.7]은 이에 반발하여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여수시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그해 7월 5일 자로 사임했다. 지방자치 역사상 최초의 단체장 불신임, 의회 해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56년 2월 13일 시장을 주민 직선제로 하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어 같은 해 8월 8일 시장을 주민이 직접 뽑았다. 선거결과 전임시장이었던 황병규가 당선되어 계속해서 시정을 이끌었다. 여천군은 9개 면에서 123명의 면 의원을 선출하였다.

8. 대통령선거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9. 지방선거

8월 8일 시읍면 의원, 시읍면 장, 8월 13일 시도의원 선거가 열렸다.

도의원에는 여수시 선거구에서 하동호[자], 여천군 선거구에서 박재규[자], 서일선[자]이 당선하였다. 제2대 도의원으로는 여수에서 하동호, 여천군 제1선거구에서 김종석, 제2선거구에서 임종훈이 선출됐다.

여수시 의원은 곽채용[자], 정석영[자], 정만수[자], 윤규봉[자], 박학래[자], 김안식[자], 이철수[자], 최대순[자], 배말암[자], 박종석[무], 강정수[자], 임선봉[자], 노준용[자], 허권[민], 심인구[자], 김정식[민], 남병일[자], 하동호[자], 문형순[자], 이기조[무]로 자유당 16석, 민주당 2석, 무소속 2석 총 20석으로 의회를 구성했으며, 황병규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여천군 면의원은 9개면에서 총 107명을 선출하였다.

10. 민·참의원 선거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제3선거구[여수] 무소속 정재완이 제12선거구[여천군]에서는 자유당의 이은태가 당선됐다.

11. 대통령 선거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5대 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자유당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하야하고 이기붕은 자살했다.

4·19 혁명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까지 하기에 이르자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된 반독재투쟁이자 혁명이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12.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민 2만여 명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경찰과 충돌 183명이 사망하고 2,269명이 부상하는 등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번져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궐기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지만,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사태의 단초는 마산에서부터 시작된다. 3월 15일 밤 3·15 부정선거를 보다 못한 마산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대적인 데모를 벌이자 진압에 나선 경찰이 발포하여 5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4월 11일 실종 27일 만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시 신포동 1가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이에 분노한 마산 시민들은 거시적인 데모를 벌였으며 전국으로 뻗어 나갔다. 4월 18일 고려대생들이 데모를 마치고 귀가 중에 동원된 정치 깡패들에 의하여 집단 테러를 당했고 이에 격분한 서울 시민 2만여 명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 데모를 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일제히 궐기,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하고 4월 28일 이기붕 일가 자살로 제1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이어 들어선 허정 과도정부에서 6월 2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7월 29일 민·참 양원 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 제2 공화국이 출범했다. 당시 여수에서는 자유당에 의하여 임명됐던 이선행 시장이 물러나고 김정식 초대시장이 과도 시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여수는 3·15 부정 선거가 막바지에 이른 3월 9일 하오(下午) 7시경, 이승만적 테러가 발생했다. 선전부장 김봉채와 문화부장 김용호가 당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1층 계단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경찰 사주를 받고 동원된 7~8명의 괴한에게 쇠파이프, 유리병 등으로 난타당해 인근 제중병원으로 옮겼으나 10일 새벽 김용호는 숨졌다. 이 사건은 3·15 마산 의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제2공화국(1960.8~1962.3]

6월 12일 외무부 장관 허정을 과도정부 수반으로 하고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5일 국회에서 가결되어 대한민국 헌법 제4호로 개헌, 양원제를 채택한 새로운 헌법에 따라 7월 29일 민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1. 민의원 선거

1960년 7월 29일 민의원 선거에서 여수는 정재완이 여천군은 김우평이 선출됐다.

참의원 선거에서는 김철주[자], 황병규[무], 이은태[자]가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당시 전라남도에서 당선된 자는 황성수[자], 조국현[민], 김남중[무], 이남규[민], 박철웅[무], 정문갑[무], 최상채[민], 양회영[민] 8석이었다.

2. 대통령 선거

1960년 8월 12일 양원 국회에서 제4대 대통령으로 윤보선을 선출했다.

그러나 5·16사태 발생 후 3일 후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정변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번번이 박정희와 충돌했다. 특히 박정희 군부의 '이승만 활동 정화법'에 반대하며 하야 결심을 굳혔다. 쿠데타 발생 10개월 만인 1962년 3월 하야했다.

3. 지방선거

1960년 12월 12일 시도의원, 12월 19일 시읍면의원, 12월 26일 시읍면장 선거를 실시했다. 4·19 혁명 후 첫 기초의회 선거였다.

1960년 12월 26일 여수시장 선거에서 신민당의 김정식 후보와 민주당의 이기조 후보, 민주당 신구파 싸움에서 신민당 김정식이 승리했다.

제3대 도의원으로 여수 제1선거구[동부]에서 박종석[민주], 제2선거구[서부] 김봉채[무]가 여천군 제1구 선거구[육지]에서 최종만[민주], 제2구 선거구[도서] 조두만[민주]이 각각 선출됐다.

여수 제3대 시의원은 이기조[민], 김안식[자], 강정수[자], 정홍수[자], 김판석[자], 문형순[민], 박종석[민], 김봉수[자], 김봉채[민], 장세종[자], 조규환[자], 정홍수[자], 황형주[자], 최기태[자], 주종석[보선], 김정기[보선], 박종대[보선], 김병숙[보선]이 당선됐다.

여천군은 8개면에서 107명의 면의원을 선출하였다.

[제3공화국(1963.12.~1979.10]

1. 대통령 선거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5·16군사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고 민정 이양의 형식으로 실시되었다. 1962년 12월 17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 구조를 대통령제로, 선거 제도를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았다.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찬성률 78.8%를 받아 채택되었으며 이에 따라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선거결과 박정희가 46.6%, 윤보선이 45.1%로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2. 국회의원 선거

12월 26일 박정희 정권의 민정 이양 후 첫 제6대 국회의원 선거로 여수시와 여천군이 1개 선거구로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었으며, 민주공화당 이우헌이 당선되었다.

3. 대통령 선거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전 선거와 마찬가지로 직선제로 치러졌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다시 접전하는 양상이었으나 선거결과 박정희 51.4%, 윤보선이 40.9% 득표했다.

4. 국회의원 선거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수시, 여천군 선거구[1개 선거구] 공화당 이우헌이 당선됐다. 여수시와 여천군이 1개 선거구로 1명을 선출했다.

5. 대통령 선거

1971년 4월 27일이다.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3선 개헌으로 대통령의 3선 연임과 대통령 탄핵 발의에 필요한 의원 수를 30명[과반수]에서 50명[3분의 2]으로 상향 조정하여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선거결과 박정희 53.2%, 김대중 45.2% 득표율로 박정희는 3선에 성공하였다.

6. 국회의원 선거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수시에서는 공화당 김상영이 여천 군에서는 공화당의 김중태가 각각 선출됐다. 3선 개헌 후 치러진 선거다. 각 지역구에서 소선거구제를 통한 직접 선거로 153명을 선출하였다. 전국구는 51명을 포함하여 모두 204명이다. 입후보 자격을 정당 추천으로 제한하여 무소속은 선출되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이승만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통일 주체 국민회의를 설치했다.

7. 통일 주체 국민회의

1972년 12월 15일 통일 주체 국민회의 제1대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여수시 제1구에서는 손정민 박종성, 김광현이 제2구에서는 서기호 박형량, 박종대가 여천군에서는 유인상, 배주환, 주장석, 주인철, 전순칠, 이만규, 정병훈이 선출됐다.

8. 대통령 선거

1972년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유신헌법]을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하였다.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시행되었으며 91.5%[투표율 92.9%]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통일 주체 국민회의는 1972년 12월 유신헌법에 의해 공포된 헌법 기관이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2000~500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고, 의장은 대통령이 맡았다. 통일 정책 최고의 결정 기관으로, 무기명 투표를 통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의 1/3을 선출하였으며 헌법 개정안을 최종확정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제8대 대통령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후보는 박정희[민주공화당] 한 명이었다. 당시 투표율은 100%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전원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선거에 참여하였다. 대의원 수는 총 2,359명으로 박정희는 2,357표[무효 2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3년, 제5대, 1967년 제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4월 27일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신헌법에서는 6년 임기의 대통령을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하고 횟수와 관계없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대통령이 입법, 사법, 행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헌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법이었다. 유신헌법을 선포하여 독재를 위한 법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9. 국회의원 선거

1978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유신헌법에 따라 중 선거구제가 실시됐다. 여수시, 여천군, 광양군이 1개 선거구로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공화당의 김상영, 신민당 박병효가 선출됐다.

10. 통일추체국민회의

1978년 5월 18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는 여수시 제1구에서 정효근, 김종길, 최재완, 주종석, 제2구 김희을, 김한태, 김정수, 윤문호 여천군은 김석우, 이영조, 서재호, 주인철, 김용권, 김학봉, 이민규, 윤병효, 김영환, 김연평, 정득균, 김종서가 당선했다. 제8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11. 대통령 선거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했다. 이전 선거와 마찬가지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로 치러졌다. 대의원 2,583명 중 2,578명이 참여했다. 후보는 박정희[민주공화당] 한 명으로 2,577표[기권 1표]를 받아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은 공석이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에 피살되었다. 1961년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18년간의 독재는 이렇게 종식되었다.

12. 국회의원 선거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여수, 여천, 광양을 1개 선거구로 한 선거에서 공화당의 이도선[광양 출신], 신민당의 박병효[여수출신]가 당선된다.

[제5공화국(1980.9~1988.2)]

1. 대의원 선거

1981년 2월 11일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가 실시되었다.

여수시 제1구 김종길, 박천섭, 제동근, 정병오, 이개동, 여수시 제2구 김용채, 이용덕, 안문성, 이상기, 유정일, 제3구 윤문호, 박채협, 한성태, 이중근, 박병갑이 선출되었다.

여천군에서는 삼일읍 이찬우, 홍진수, 서재호, 돌산읍 주경용, 황용섭, 정윤홍, 쌍봉면 정채욱, 이태주, 소라면 박형조, 정재열, 율촌면 윤달호, 최종남, 화양면 조정만, 박상순, 김현모, 남면 송기수, 김동민, 화정면 이정일, 강인귀, 삼산면 김상석, 김성택이 선출되었다.

2. 대통령 선거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이 당선하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 구 이승만인들의 이승만 활동을 규제한 가운데, 1981년 1월 15일에 창당했다. 사실상 전두환의 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다.

민주 정의당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통일주최 국민회의 제도를 모방해 대통령 선거인단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선거결과 전두환 후보가 유효투표수의 90.2%인 4,755표를 얻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 1981년 3월 3일, 임기 7년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를 통한 대통령 선출이었다.

3. 국회의원 선거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제5공화국 출범 후 정쟁법에 묶여 활동하지 못했던 인사들이 해금돼 신당 돌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실시된 선거였다.

전남 제4선거구(여수, 여천 광양)에서 신한민주당 신순범, 민주정의당 김재호를 선출했다.

1986년 4월 1일 구 여천군 쌍봉면, 삼일면 자리에 여천시가 설치됐다.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에서 지방자치 부활을 약속하고 1988년 12월 지방자치법을 전면 개정, 1991년 3월 21일 기초의원 선거, 6월 20일 광역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6·29 민주화 선언은 6월 민주 항쟁의 결과 시민들의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끊임없는 불신과 저항으로 궁지에 몰린 집권 여당의 대표가 발표한 이 선언으로 인해 헌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제9차 개정 헌법이 발의되었다.

[제6공화국(1988.2~1993.2]

1. 대통령 선거

1987년 12월 16일 노태우는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6월 항쟁의 결과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직선제로 치러졌다. 후보는 노태우[민주정의당], 김영삼[통일민주당], 김대중[평화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 신정일[한주의 통일한국당] 등이다. 선거결과 노태우가 36.7%의 지지율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보별 득표율은 김영삼 28%, 김대중 27.1%, 김종필 8.1% 등이다. 투표율은 89.2%였다.

2. 국회의원 선거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여수시는 민주당 김충조, 여천시, 여천군은 민주당 신순범이 당선됐다.

3. 지방선거

1991년 3월 26일 구시군의회, 6월 20일 시도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1991년 지방선거 당시 전국적으로 시(市)는 67개, 군(郡)은 137개, 자치구는 56개로 기초단체는 모두 260개였으며 기초의원 수는 모두 4,704명이다. 광역단체는 서울특별시와 부산직할시 등 5개 직할시와 9개 도를 포함하여 총 15개에서 866명의 광역의원이 선출됐다.

여수시 시의원 선거에서는 강맹선, 강회성, 고효주, 김명호, 김복곤, 김용재, 김평호, 박양신, 박정일, 박중석, 백한주, 서양성, 이광수, 이무성, 이용화, 임시택, 정이근, 조상현, 추상은, 송전석, 전부기, 박평석, 김상효, 박병갑, 서완석, 정채만, 서종대, 박행순 등 28명이 당선했다.

여천시는 김영훈, 김정민, 김철수, 김형만, 박정채, 박한병, 심재현, 오병선, 이영조, 이훈재, 정상경, 정상호, 최창규, 허영문 등 14명, 여천군은 김봉재, 김상효, 김정곤, 박산수, 박평근, 박행순, 임길동, 임홍섭, 정원춘, 최종선 등 11명을 선출했다. 당시 관선 시장, 군수 시절로 반쪽 자치였다.

도의원으로는 여수시 제1선거구 김인식[국민회의], 제2선거구 이상운[국], 제3선거구 이재찬[국], 여천시 제1선거구 박병열[국], 제2선거구 남택수, 제3선거구 김성한, 여천군 제1선거구 김종철[국], 제2선거구 주승용[국], 김길봉[무]을 선출했다.

4. 국회의원 선거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수시는 민주당 김충조, 여천시, 여천군에서는 민주당 신순범이 당선된다. 유일하게 임기 내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경험하게 된다.

[문민정부(1993.2~1998.2)]

1. 대통령 선거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이 당선됐다. 직선제로 치러졌으며, 42%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 지방 선거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6월 27일 지방의회는 물론 단체장까지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전국적으로 광역단체장 15명, 기초단체장 230명, 광역의원 970명, 기초의원 4,541명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기초자치 단체장, 기초의회 의원, 광역단체장, 광역의회 의원을 모두 주민이 선출해 현재의 지방자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수시장에 민주당의 김광현, 여천시장에 민주당 정채호, 여천 군수에 민주당 정근진이 당선됐다.

도의원에는 여수시 제1선거구 김인식[민], 제2선거구 이상운[민], 제3선거구 이재찬[민], 여천시에서 제1선거구 박병열[민], 제2선거구 남택수[민], 제3선거구 김성한[민], 여천군은 제1선거구 김종철[민], 제1선거구에서 김길봉[민], 주승용[무]을 각각 선출했다.

시의원에는 백용구[종화동], 김성식[수정동], 추상은[공화동], 성해석[관문동], 정이칠[고소동], 왕봉화[동산동], 김용욱[중앙동], 김영규[교동], 박기수[군자동], 강진원[충무동], 정원춘[연등동], 박평석[광무동], 김동화[서교동], 석진수[봉강동], 이성수[봉산동], 임용택[남산동], 김미자[국동], 김정완[신월동], 박순영[경호동], 송대수[여서동], 박정일[여서동], 정선근[문수동], 고효주[오림동], 최석규[미평동], 박기성[둔덕동], 서양기[오천동], 최동훈[만성동], 김갑수[덕충동] 등 28명, 여천시 이동찬[쌍봉동], 김철수[쌍봉동], 김정민[시전동], 정상경[시전동], 오병선[여천동], 박정채[주삼동], 이훈재[삼일동], 박한병[묘도동], 이영조[상암동] 9명, 여천군 임인환[돌산읍], 정병관[소라면], 위장환[율촌면], 김정곤[화양면], 하정성[남면], 임홍섭[화정면], 임길동[삼산면]을 선출했다.

[국민의 정부(1998.2~2003.2)]

1. 대통령 선거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이승만국민회의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직선제로 시행되었다. 득표율 38.7%인 이회창을 누르고 40.3%의 지지율로 당선된 것이다.

2. 삼여통합

1998년 4월 1일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삼여가 통합됐다.

1914년 여수군(麗水郡)이 1949년 여수시(麗水市)로 승격되면서 여천군(麗川郡)이 설치되었다. 1974년 4월 1일 여천 공업단지 개발구역으로 고시[건설부고시 제92호]되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서 1986년 여천군 일부[쌍봉, 삼일]를 분할, 여천시를 설치하게 된다.

1997년 12월 17일에 제정된 「전라남도 여수시 도농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4월 1일 여수반도와 부속 도서에 있던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이 각각 폐지되고 도농복합형태의 여수시로 통합한 것이다.

삼여 통합은 원래의 1949년 여수시 상태로 되돌리는 것 임에도 지난 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1994년 3월 24일부터 4월 29일까지 37일간 제1차 분리 통합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조사서를 우편으로 투표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 인구 10만 미만 도시 33개를 군과 통합하는 도농통합을 이루기 위한 제1차 주민투표였다.

여수시와 여천군 섬 지역 통합 여수시로, 여천시와 여천군 육지지역은 통합 여천시로 통합하는 안이었다. 여수 지역은 찬성 7.3%, 반대 92.70%, 여천시는 찬성 87.40%, 반대 11.80%, 여천군은 찬성 63.20% 반대 36.80%로 무산되었다.

4월 30일부터 5월 10일까지 제2차 주민투표에서는 육지와 도서부를 하나로 묶어 통합 여수시로 하는 제안이었다. 1차 제안과 달리 여수시 찬성, 여천시와 여천군의 반대로 무산됐다.

제3차는 정부의 방침대로 투표소에서 찬·반 투표를 실시했으나 여천시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1998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한해 앞둔 1997년에 삼여가 통합이 주민 발의에 의하여 재점화 된다.

삼여통합은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주민에게 시사한 바가 크다. 주민 발의에 의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도 매우 민주적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여천군을 나누어 여수시와 여천시에 각각 통합시키는 분리통합 안을 반대하고 임시 구성된 단체와 꾸준한 협상,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여론 조사 등 주민 자치의 역량을 크게 증진 시켰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삼여 통합을 위한 여수시의 양보안이 수용되면서 통합은 크게 탄력을 받게 된다.

3. 지방 선거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됐다.

통합 시의 시장에는 주승용이 당선되었다.

도의원은 여수시 갑 지역 제3선거구에서 새이승만국민회의 박병열, 여수시 제4선거구에서 박동현[새], 제5선거구에서 김종철[새], 제6선거구에서 김선곤[새]이 여수을 제1선거구에서 이상운[새], 제2선거구에서 김인식[새]을 선출하였다.

시의원은 여수시 갑 지역에서는 김명남[돌산읍], 정병관[소라면], 위장환[율촌면], 김일랑[화양면], 하정성[남면] 정근진[화정면], 이만규[삼산면], 이동찬[쌍봉동], 최철훈[시전동], 황치종[여천동, 주삼동], 최현범[삼일동, 상암동], 심기보[묘도동]가 당선되었으며, 여수을 지역에서는 백용구[동문동], 추상은[한려동], 정이칠[중앙동], 전부기[충무동], 박평석[광림동], 석진수[서강동], 이성수[대교동], 윤문호[국동], 서완석[월호동], 천상국[여서동], 최채곤[문수동], 이삼용[미평동], 박기성[둔덕동], 서종대[만덕동]로 갑·을 지역 14명씩 모두 28석이었다.

시군의원은 여수시가 28명, 여천시 9명, 여천군 7명이 당선되었다.

4. 국회의원 선거

2000년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통합 이후 첫 선거였다. 새천년민주당의 김충조가 당선되었다.

5. 지방 선거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시장에는 새천년 민주당 김충석이 당선되었다.

도의원으로 여수시 제1선거구에서 새천년민주당 김종철, 제2선거구 송대수[새천년], 제3선거구 박병열[새천년]이 당선되었다.

시의원으로는 돌산읍 선거구에서 김명남, 소라면 정병관, 율촌면 최종선, 화양면 이길용, 남면, 김재철, 화정면 배상수, 삼산면 지원영, 동문동 백용구, 한려동 추상은, 중앙동 김영규, 충무동 강진원, 광림동 박옥심, 서강동 정태호, 대교동 이성수, 국동 이행우, 원호동 박순영, 여서동 성해석, 문수동 강용주, 미평동 이신호, 둔덕동 김덕수, 만덕동, 김상열, 쌍봉동 서현곤, 시전동, 김정민, 여천동 황치종, 주삼동 박정채, 삼일동 주재선, 묘도동 심재수가 각각 선출되었다.

[참여정부(2003.2~2008.2)]

1. 대통령 선거

2002년 12월 19일 새천년 민주당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다.

이회창 후보 46.6%, 노무현 후보가 48.9%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최초 단일 선거구에서 1개 선거구가 증설되어 갑·을 구역에서 선출되는 첫 선거였다. 여수 갑구에서 통합민주당 김성곤이 을구에서 통합민주당 주승용이 당선되었다.

2004년 주민투표법 제정으로 지자체장의 주요 결정사항에 대해서 주민투표가 가능해졌다.

2. 지방 선거

2006년 5월 31일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시장에는 민주당 오현섭이 당선되었다.

도의원에는 민주당의 김종철, 민주당 송대수, 민주당 서일용, 민주당 최종선이 선출되었다. 시의원에는 여수시 가 선거구 열린우리당 서완석, 민주당 박순영, 나 선거구 정한태[열], 김명남[민], 김영규[민], 다 선거구 강용주[열], 고효주[민], 박옥심[무], 라 선거구 강진원[민], 성해석[민], 최대식[민], 마 선거구 이기동[열], 이삼용[열], 김덕수[민], 바 선거구 박정채[열], 최철훈[열], 김정민[민], 사 선거구 정병관[열], 정빈근[열], 박평근[민], 아 선거구 김순빈[열], 박동영[민], 서현곤[민]이 당선되었다.

비례대표로 열린민주당 송재향, 민주당 차성업, 민주당 추상은이 선출되었다.

민주당 14석, 열린우리당 11석, 무소속 1석, 26석으로 의회를 구성했다.

2006년 주민 소환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주민들에게 지방행정 통제권이 부여되었으며, 2007년 12월 19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명박 정부(2008.2~2013.2)]

1. 대통령 선거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에 한나라당 이명박이 당선되었다. 이명박 후보가 48.67%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2008년 4월 쇠고기 협상 위기를 초래한 5월 광우병 촛불시위, 2008년 7월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에 대한 뇌물 및 비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수사, 8월 뉴딜정책을 제시하고 12월 22조 원의 예산을 투입 건국 이래 최대 치수 사업을 단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2. 국회의원 선거

2008년 4월 9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통합민주당의 김성곤, 통합민주당 주승용이 당선되었다. 전국구에 여수 출신 통합민주당 서종표와 김충조가 선출되어 여수 출신 국회의원이 4명이나 진출하는 신기록을 남겼다.

3. 지방 선거

1910년 6월 2일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시장에는 무소속 김충석이 당선되었다.

도의원에는 여수 제1선거구 민주당 이광일, 제2선거구 송대수[민], 제3선거구 성해석[민]. 제4선거구 정빈근[민], 제5선거구 서현곤[민], 제6선거구 최철훈[민]이 당선되었다.

시의원에는 여수시 가 선거구 민주당 명중남, 무소속 정한태, 나 선거구 서완석[민], 이성수[민], 다 선거구 김유화[민), 최대식[민], 최석규[민], 라 선거구 고효주[민], 김영규[민], 강진원[민], 김성식[민], 마 선거구 정옥기[민], 황치종[무], 바 선거구 정병관[민], 김순빈[민], 사 선거구 김종길[국민 참여당], 이대길[무], 아 선거구 박정채[민], 자 선거구 김덕수[민], 이선효[민], 이기동 [민], 전창곤[국민참여당]이 선출되었다. 비례대표로 백인숙[민], 주연창(민), 임순악[민주노동당]이 선출 되었다.

4. 국회의원 선거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통합당 김성곤, 주승용이 당선되었다.

[박근혜 정부(2013.2~2017.3)]

1. 대통령 선거

2012년 12월 1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새누리당 박근혜가 당선되었다.

2016년 4월 13일 제20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122석, 민주당 123석, 국민의 힘 38석으로 여소야대가 되었다. 2016년 9월 최순실 게이트로 국정동력이 와해되었다. 10월부터 퇴진 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지방까지 확대되었으며 결국 2017년 3월 10일 법원의 탄핵이 인용돼 대통령직에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2. 지방 선거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도의원은 제1 선거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윤문칠, 제2선거구 최대식[새], 제3선거구 서정한[새], 제4선거구 주연창[새], 제5선거구 이경미[새], 제6선거구 서일용[새]이 당선되었다.

여수시장에는 시장 새정치 민주 연합 주철현이 당선되었다.

시의원에는 여수시 가 선거구 새정치민주연합 오홍우, 무소속 정한태, 나 선거구 노순기[새], 서완석[새], 다 선거구 최석규[새], 김유화[새], 김행기[무], 라 선거구 이상우[새], 김성기[새], 장광진[새], 박옥심[무], 마 선거구 정옥기[새], 강재헌[무], 바 선거구 김순빈[새], 주재현[새], 사 선거구 김종길[새], 고희권[새], 아 선거구 박정채[새], 이찬기[새], 자 선거구 이선효[새], 김양효[새], 전창곤[새], 송하진[무]이 선출되었다.

비례대표로 박성미[새], 추미향[새], 김재영[통합진보당]이 선출되었다.

3. 국회의원 선거

2016년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민의당 이용주와 국민의당 주승용이 당선되었다. 비례대표로 최도자가 선출되었다.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 되었다.

[문재인 정부(2017.5~2022.5)]

1. 대통령 선거

대통령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이 당선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박근혜] 탄핵심판 청구에 관해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인용 결정을 내리면서 대통령이 파면[탄핵]되어 선거일이 앞당겨졌다. 2016년 12월 3일 국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 재직 중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최순실 등 비선 실세를 통한 권력 남용으로 다수의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혐의다. 대통령이 파면[궐위]되면 60일 이내에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은 2017년 5월 9일 화요일로 결정되었다.

권 이후 2017년 12월까지 대통령 직무수행평가가 70% 아래로 떨어진 횟수가 단 2회에 불과할 정도로 지지율이 고공 행진했다.

2. 지방 선거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여수시장에 무소속 권오봉이 당선되었다.

도의원에 여수시 제1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광일이 제2선거구 강문성[더], 제3선거구 민병대[더], 제4선거구 최무경[더], 제5선거구 최병용[더], 제6선거구 강정희[더] 선출되었다.

시의원에는 여수시 가 선거구에서 박성미[더], 민주평화당 정광지, 나 선거구 서완석[더], 김승호[더], 다 선거구 백인숙[더], 전창곤[더], 송하진[무], 김행기[무], 라 선거구 이상우[더], 강현태[더], 송재향[더], 김영규[무], 마 선거구 나현수[더], 강재헌[무], 바 선거구 정현주[더], 주재현[더], 사 선거구 문갑태[더], 고희권[더], 김종길[민주평화당], 아 선거구 주종섭[더], 이찬기 [더], 정경철[더], 이선효[민주평화당]가 당선되었다.

비례대표는 민덕희[더], 고용진[더], 이미경[더]이 당선되었다.

3. 국회의원 선거

2020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여수시 갑구 더불어민주당 주철현, 을구 더불어민주당 김희재가 당선되었다.

[윤석열 정부(2022.5~2027.5)]

1. 대통령 선거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는 국민의 힘 윤석열이 당선되었다.

재외선거는 2022년 2월 23일~2월 28일, 사전투표는 2022년 3월 4일과 3월 5일, 본 투표는 2022년 3월 9일 각각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윤석열 48.56%를 이재명 47.83% 득표로 0.73%p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 검찰총장의 출신으로, 총장 사퇴 1년여 만이자, 정계 입문 9개월 만에 당선이다.

정부 출범 시점인 2022년 5월 10일 기준 제21대 국회 구성이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109석]보다 더불어민주당[168석]의 의석수가 59석이 더 많은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다. 이 같은 국면은 2024년 4월 예정된 제22대 총선까지 최소 2년은 이어지게 되었다.

2. 지방 선거

2022년 6월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됐다.

도의원에는 제1선거구[돌산읍, 남면, 삼산면, 대교동, 국동, 월호동]가 더불어 민주당 이광일이 무투표 당선되었으며, 제2선거구[동문동, 한려동, 중앙동, 충무동, 서강동, 미평동, 만덕동, 삼일동, 묘도동]는 더불어민주당 서대현, 제3선거구[광림동, 여서동, 문수동]는 더불어민주당 강문성이 당선되었다. 제4선거구[소라면, 율촌면, 여천동]는 더불어민주당 최무경, 제5선거구[화양면, 쌍봉동, 주삼동]는 더불어민주당 최병용이 무투표 당선, 제6선거구[화정면, 둔덕동, 시전동]는 더불어민주당 주종섭이 무투표 당선했다.

여수시 가 선거구[돌산읍, 남면, 삼산면] 김철민[더], 박성미[더], 나 선거구[국동, 대교동, 월호동] 고용진[더], 정신출[더], 다 선거구[동문동, 한려동, 중앙동, 충무동, 서강동] 김영규[더], 강현태[더], 라 선거구[미평동, 만덕동, 삼일동, 묘도동], 구민호[더], 송하진[무], 마 선거구[광림동, 여서동, 문수동], 민덕희[더], 백인숙[더], 김행기[더], 이미경[더], 바 선거구[여천동], 강재헌[더], 정옥기[무], 사 선거구[율촌면, 소라면], 정현주[더] 주재현 [무], 아 선거구[쌍봉동, 화양면, 주삼동], 박영평[더], 김종길[더], 문갑태[무], 자 선거구[ 화정면, 둔덕동, 시전동], 최정필[더], 이선효[더], 이찬기[더], 이석주[더]가 당선되었으며, 비례대표로 더불어민주당 진명숙, 김채경, 홍현숙이 선출되었다.

총 여수시의회 의원 정원 26명[지역구 23명, 비례대표 3명]이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 약 3개월 후 실시되었으나 지방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했고 공천 탈락자의 반발로 무소속이 선전했다.

[현황]

한국의 지방자치 역사는 크게 도입기(1948~1960년), 중단기(1961~1990년), 부활・발전기[1991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 1995년 6월 27일 지방의회 만이 아니라 단체장까지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주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기초 자치단체장, 기초의회 의원, 광역 자치단체장, 광역의회 의원을 선출해 현재의 지방자치 기틀이 갖춰졌다.

2000년대에는 주민참여를 통하여 실질적인 지방자치를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2004년 주민투표법 제정으로 지자체장의 주요 결정사항에 대해서 주민투표가 가능해졌고, 2006년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주민들에게 지방행정 통제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방의회의 독립성과 자율권은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기초단체 의원은 동·읍·면에서 1명씩을 선출했다.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정당 공천제가 아니고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2006년 제4회 지방선거부터 유급제로 바뀌고 정당 공천제로 변경되었다. 정당공천이 중앙정치와 지방정치를 연계해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앙정당이 기초의원들과 책임을 함께함으로써 지방 의정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취지였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도의원 4개 선거구에 민주당 4석, 시의원 23개(비례대표 제외) 선거구에서 열린민주당 10석, 민주당 13석, 제5회 도의원 6개 선거구에 민주당 6석, 시의원 23개 선거구에서 17석, 국민참여당 2석, 무소속 3석, 민주노동당 1석, 제6회 선거에서 도의원 6개 선거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6석, 시의원 23개 선거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18석, 무소속 5석, 제7회 도의원 6개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6석, 시의원 23개 선거구에서 16석, 민주평화당 3석, 무소속 4석, 제8회 도의원 선거에서 6개 선거구에서 민주당 6석, 시의원 23개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19석, 무소속 4석을 제8회 도의원 선거에서는 6개 선거구에서 민주당 6석, 시의원 23개 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19석, 무소속 4석을 기록하고 있다. 국민의 힘 윤석열이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국민의 힘 소속 시·도 의원은 출마조차 하지 않았다.

여수반도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여수시와 여천군에서 각각 1명씩, 모두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심지어 여수, 여천, 광양을 포함한 중 선거구제가 실시된 제9대 선거구에서도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출까지 지속 되었다.

여수는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가 삼여통합을 이룬 여수의 주민통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구가 ‘갑’, ‘을’ 구역으로 양분되어 있고 국회의원이 각각 지역 협의회장을 맡고 있어 공천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시의회는 각기 다른 세력 때문에 양분되고 경쟁적인 정책으로 효율적 의회 운영을 방해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인구감소로 향후 단일 선거구로 조정될 전망이 높아 수위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여수시는 국회의원 김희재, 주철현, 사장 정기명, 시의회 의장 김영규 모두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았다. 두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에서 경쟁하고 따라서 시의회는 비슷한 세력의 의원으로 갈려 있다. 중립을 지켜야 할 의장은 양쪽 눈치를 살펴야 한다. 여수 인구감소로 선거구가 1개로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점쳐지고 있어 두 의원은 의정활동, 지역구 관리, 정책지원 등 제반 활동에 경쟁하고 충돌한다. 이로 인한 지역주민의 피로는 더욱 축적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0.12.25 정치 해방을 광복으로 수정
2010.09.07 정치 제18대 국회의원 당선자 현황 추가 기록 제4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당선자 기록 - 도지사, 시장 등 제5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당선자 현황 기록 - 도지사, 시장, 도의원, 시의원 등 참고문헌 중 통계연보 연도 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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