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32 |
---|---|
한자 | 三-一運動 |
영어의미역 | 1919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승 |
성격 | 항일운동 |
---|---|
발생(시작)연도/일시 | 1919년 3월 27일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양산읍내 장터 |
관련인물/단체 | 한용운|오택언 |
[정의]
1919년 3월과 4월에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마을과 양산읍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발단]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던 오택언(吳澤彦)이 한용운의 지시로 통도사에 내려와서 통도사 강원(講院) 학생 대표들과 만나 만세 시위를 할 것을 결의하고 1919년 3월 13일 신평(新坪)마을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또 인근 부산에서는 1919년 3월 11일 부산 초량 일신여학교의 시위와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생 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어 양산 장날인 3월 27일 양산읍내에서 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과]
1919년 3월 13일 신평마을 장날 통도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 김상문(金祥文)을 선두로 수 명의 학생과 통도사 승려들이 군중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로 인해 김진옥(金鎭玉)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았고, 주동자 김상문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여 상해임시정부에합류하였다. 이어 5월 4일에는 400여 명의 주민이 재차 시위를 하였다. 두 번째 시위는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하였다. 또 아주 격렬하여 일본 헌병들의 무기를 빼앗기도 하였으며, 이웃 언양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초량 일신여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생들의 동래 시위 소식 등을 알게 된 엄주태가 3월 15일 자신의 집에서 전병건과 만나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고 독립선언서 5장을 복사하면서 양산 시위는 준비되었다. 두 사람은 복사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박삼도·정주봉·이귀수(李貴守) 등의 동조자들과 함께 양산장날인 3월 27일 장터로 잠입하여 시위를 주동하였다.
강재호(姜在鎬)와 안덕원(安德元), 그리고 전병건과 친척으로 부산부 영주동에 거주하던 전병한(全秉翰) 등도 장날 장사꾼 사이에 끼어 시위를 하였다. 삽시간에 3천여 명으로 늘어나 시위 군중은 독립 만세를 외쳤고 헌병대는 진압에 나섰다. 주동자들을 곧바로 양산헌병대에 검거되어 이틀 뒤 부산헌병대로 이관되었다가 부산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군중들은 분격하여 다시 궐기하였다. 1차 시위 때 검거를 모면했던 이귀수는 류계문(柳桂文) 등과 함께 4월 1일 오후 2시에 많은 사람들을 운집시킨 가운데 양산 읍내 시위 주동자를 체포해 간 데 맞서 재차 독립 시위를 주도하였고 두 사람 또한 체포되었다.
[결과]
시위 주동자들 11명은 대구감옥에서 8개월에서 2년의 형을 살게 된다. 양산 3·1운동에 참가한 다수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출옥 이후 1920년대 양산 지역 사회 운동과 민족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양산 3·1운동은 읍외 지역인 신평마을에서 두 차례, 읍내에서 두 차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날 정도로 시위가 격렬하고 대규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