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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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孝烈 |
영어의미역 | Loyalty, Filial Piety and Fedelity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집필자 | 이창언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충신·효자와 효부·열녀.
[개설]
예로부터 사회의 기본 윤리로 존중되던 충·효·열의 행적이 있는 인물을 가리킨다. 신라시대부터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충·효·열의 행적이 있는 인물에 정문과 정려를 세워 포장하였는데, 고려시대를 거쳐 유교적 교화를 강화하였던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확장되었다. 울진 지역에서도 충·효·열의 행적이 있는 인물이 많다.
[고려시대]
정종 때 삭방도안렴사를 지낸 장말익은 나라에 공을 세워 울진부원군에 훈봉되었다. 임우는 고종 때 아골타의 난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울릉군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충경이다. 손인량은 원종 때 임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기성후에 봉해졌다. 충렬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황서는 나라에 공을 세워 기성군에 봉해졌다.
고려 말 강원도안렴사였던 전자수는 고려의 국운이 쇠하는 것을 한탄하여 평해에 은거하였다. 삭방도안렴사와 호조참판을 지낸 장천영은 고려의 복권운동을 모의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릉에 은거하였다. 이밖에도 임제, 최복하·전생·김제·이사경·손휴·손영·손번 등은 고려 복권 운동에 가담하거나 마지막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울진 지역의 여러 인물 가운데 충효를 고루 갖춘 인물로는 선조 때 정문을 받은 충효당 주경안을 들 수 있다. 주경안은 왕과 왕후의 상을 맞아 삼년상을 치르면서 죽만 먹었으며, 7년의 왜란 동안 국운의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 사람들이 축천대라 하였다. 부친이 학질을 앓을 때 자기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묻힌 종이를 태워 그 재를 술에 타서 드시게 하여 효험을 보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황여일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권율장군과 함께 행주대첩과 진주성전투에 공을 세웠다. 윤시형은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병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해 병구완을 하였다. 최시창·남수·최면 등은 단종에 충성을 버리지 않은 인물이고, 김언륜·정담·이우설·남몽길·장대룡·황중량·황식 등은 왜란·호란·이괄의 난 때 충의를 다한 인물이다. 이밖에도 울진 지역에는 구한말의 의병활동과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투쟁을 통해 국운 회복에 앞장 선 수많은 인물이 있다.
울진 지역의 수많은 효행과 관련하여 「효자 장동유의 예조입안문」, 「효자 황숙의 정포문」, 「열녀 삼척김씨 예조입안문」 등의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열녀 삼척김씨는 김흥시의 딸로 장효권의 처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남편을 따르려 했으나, 생존한 시모를 섬기면서 매일 남편의 묘에 가서 곡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곳을 열부굴이라 하였는데, 후에 군수가 표창을 하려 하니 고부가 함께 사양하였다고 한다.
[근현대]
울진 지역에서 열녀의 전통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곽종목의 처인 장범곡은 가난한 집에서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다. 남편이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을 하다 서간도에서 전사하자 유골을 고향에 안장하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무릅썼다. 마침내 남편의 유골을 선영 묘 밑에 안장하고 삼년상을 치렀다.
남태연의 딸이자 전성수의 처인 남씨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구한말 의병 봉기 때 시부가 가담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일본 헌병으로부터 시부가 곤욕을 치르게 되자 남씨가 시부 위에 엎드려 대신 매를 맞았다.
이밖에도 울진 지역에는 여러 효부와 열녀가 있는데, 대체로 시부모나 남편에 대한 지극한 병구완과 집안 어른의 사망 이후 시묘살이에 정성을 다한 사례가 많다. 이 중에는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산신령이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도움으로 역경을 극복한 설화적인 사례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당시 충·효·열에 대한 울진 지역 주민들의 높은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