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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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仡 |
이칭/별칭 | 구지(懼之),성은(城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구지(懼之), 호는 성은(城隱). 아버지는 신원록(申元祿)이며, 의성(義城) 사람이다.
[활동 사항]
신흘(申仡)[1550~1614]은 아버지가 사망하자 삼년상을 마친 후 묘소 아래 집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편액을 달고 애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영가 교수(永嘉敎授)를 지냈다. 전쟁이 일어나자 형인 신심(申伈)을 도와 창의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고 수 백 명을 모집하여 김해(金垓)·유종개(柳宗介)·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왜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하였다. 1603년(선조 36) 조정의 명으로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다. 1608년에는 종질인 신홍도(申弘道)와 함께 회퇴[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두 분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 5)에는 정인홍이 국정을 농락하고 성현을 모함한 무현죄(誣賢罪)로 논핵하기도 하였다. 그 후로는 어지러운 세상에 나서지 않고 두문불출하면서 고요함을 지켰으며, 경전과 역사책을 보면서 스스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아들 삼형제[신적도, 신달도, 신열도]를 잘 교육하여 충신, 정치인, 학자로 키웠으며, 이로써 의성 지역 명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읍파인 광부(光富) 계열이 중추가 되어 전성기를 열었다.
[저술 및 작품]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고, 유집으로 『성은일고』가 있다.
[상훈과 추모]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사림에서 신적도, 신달도, 신열도 삼형제를 비롯하여 신적도의 아들 인재(忍齋) 신채(申埰) 부자를 단구 서원(丹丘 書院)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