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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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體育 |
영어공식명칭 | Physical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성호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행하여진 스포츠 및 학교체육의 제반 활동.
[개설]
한국의 체육활동은 전통 무예 및 민속놀이 중심에서 근대 개화기의 서구 문명 유입에 따라 점차 체조, 유희, 스포츠 등으로 확대되었다. 서구식 근대 체육은 개화사상과 신문물의 영향을 받은 개화된 지식인, 외국의 선교사 등에 의해 우리나라 전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사립학교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순천에서는 순천매산중학교, 순천매산고등학교, 순천고등학교, 순천농업학교, 순천사범학교 등이 근대 스포츠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순천과 근대 체육]
1910년 미국 선교사 변요한(變要翰)[John Fairman Preston, 1875~1975], 고라복[Robert Thronwell Coit, 1878~1932] 목사가 금곡동에 사숙(私塾)을 연 후 이를 발전시켜 1913년 고라복 선교사를 초대교장으로 사립은성학교[매산학교 전신]를 설립하였다. 매산학교는 서양의 근대문물을 순천 지역에 보급하면서 자연스럽게 근대 스포츠를 학교체육에 접목시키기 시작하였다. 선교사 중 특히 3대 교장 이보린[J. B. Revnolds]과 4대 교장 윈거(J. R. Unger)는 축구, 야구, 농구 등의 서양스포츠를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학생들이 기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다양한 스포츠를 소개하였다.
숭실전문대 출신으로써 평양 무오축구단 선수로 활약했던 김원복이 매산학교에 새로 부임하면서 순천의 축구는 여러 가지 기초 기술 등이 대중화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더불어 김원복은 순천보통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에서 학교체육을 근대체육으로 활성화하는 데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순천 묵정밭에서 학생뿐 아니라 시민을 대상으로 축구, 농구 등을 지도하기 시작하였고, 매산학교에 운동장이 만들어진 후에는 그곳을 통해 다양한 근대 스포츠를 전파하였다. 특히, 김원복은 그중 축구 지도에 열성을 다해 순천을 대표하는 1931팀, 순천철도국팀이 탄생하는 초석을 다지며 순천체육 발달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매년 하계방학에는 순천의 각 읍에서 축구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전라남도 여수·광양·구례·곡성, 경상도와도 교류하였다. 그 후 1931팀이 창단되어 보다 맹렬히 활동하였으며, 1936년에는 일본에서 공부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축구팀을 구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경기를 하였는데, 그들은 유일하게 순천에서만 패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서울, 함흥, 평양 등 대도시와 순천의 4개 도시에서만 전국축구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작은 도시 순천 축구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반영하고 있는 증거이다. 광복이 되자 순천철도국팀이 창단되어 전국 우수선수 수상자인 오일룡을 배출하는 등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2019년 현재 순천은 순천중앙초등학교, 순천매산중학교, 순천고등학교에서 축구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광복 이전 순천 체육사]
순천의 야구, 정구, 축구, 육상 등의 근대 스포츠는 정문기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는 순천 출신으로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学]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하였는데 방학을 틈타 고향을 방문하여 일본의 신문물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근대스포츠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때 순천의 체육활동은 육상, 축구, 정구, 야구 등을 중심으로 이루었다. 그 중 야구는 일본인들이 주축이 되어 행해졌고, 육상, 축구 등은 주로 한국인들이 즐기는 종목이었다. 1935년 순천농림학교가 개교하여 축구, 육상 등이 학교체육으로 보다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으며, 1938년 순천공립중학교가 개교하자 근대 스포츠는 더욱 왕성하게 확산되었다. 당시 순천공립중학교의 체육 교사는 일본 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일본인 마쯔무라[松村]였는데, 그에 의해 근대 스포츠 종목인 축구, 정구, 유도, 기계체조, 농구, 배구 등이 소개되었다. 1937년 매산학교가 신사참배거부사건으로 폐교되어 학생과 교직원이 순천보통학교에 병합되었는다. 이는 근대 스포츠가 초등학생에게까지 전파되어 순천의 체육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를 마련한 기회였다. 1937년 일본이 만주침략의 야욕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순천의 학교체육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한 마라토너 중 한 사람이 바로 순천 출신 남승룡(南昇龍) 선수다. 남승룡은 1936년 하계올림픽 베를린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고 금의환향하여 우리 민족과 순천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권투의 서정권 선수는 전 일본 아마추어 선수권대회를 비롯하여 관동학생 선수권대회 등 각종 경기에서 우승하며 복서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1931년 4월 도쿄[東京]에서 열린 프로데뷔전에서 일본 경량급 최강자 가시와무라고로를 1회 1분 만에 KO로 대파하여 일본인 조선인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이는 강자인 일본인에게 조선인이 얻어맞는 장면을 기대했던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게 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프로로 데뷔하여 1년 만에 무패 27승[11KO]을 기록하고 세계챔피언을 향해 도전한 서정권은 1932년 샌프란시스코 원정 경기에서 4차례 KO승을 거두는 등 돌풍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돈벌이에만 눈이 먼 미국인 매니저가 무리한 경기 일정을 잡는 등 상업적으로 만 서정권을 이용하여 세계참피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계랭킹 6위까지 오르는데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광복 이후 순천 체육사]
1945년 광복이 되자 1947년 순천사범학교가 개교하였고, 순천사범학교의 체육 교사로 성희준, 박만호가 부임하여 축구, 배구, 육상, 권투 등을 지도하였다. 특히 순천사범학교의 배구팀의 명성은 대단하였는데, 김덕수가 조직한 순천철도국팀과 함께 순천배구의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 순천사범학교 배구팀은 순천에 원정 경기를 온 광주 의대팀과 법원광장[현 순천시 행동 79-2]과 철도운동장[현 순천시 조곡동]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경기를 하며 순천시민들에게 배구를 소개하는 매파역할을 하였다. 또한, 순천공립중학교, 순천농림학교, 순천사범학교, 매산학교 간 축구대항전은 순천의 인기 행사로 자리 잡아 졸업생과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64년 김병옥이 순천고등학교의 체육 교사로 부임하면서 순천고등학교에 배드민턴팀을 창단하여 2년 만에 전국 대회 고등부를 석권하고 제46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 후 순천고등학교 배드민턴팀은 매년 각종 전국대회에서 입상하였으며, 각종 국제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여 국위를 선양하였으나 1974년 팀이 해체되어 큰 아쉬움을 남겼다. 국가대표 코치로 활약한 노정권,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김봉섭, 한국체육대학 교수를 지낸 박기헌 등은 당시 맹렬하게 활동했던 대표선수들이다. 또한 1973년 4월 김병옥 교사는 양궁팀을 창단하여 창단 첫해 제5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이기식 선수가 30m 한국신기록을 수립하는 등의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순천고등학교 양궁팀은 각종 대회마다 우수한 성적을 기록할 뿐 아니라 국가대표와 지도자 등의 인재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고 있다. 2019년 현재 순천의 양궁 팀은 순천성남초등학교, 순천풍덕중학교, 순천고등학교, 순천여자고등학교, 순천대학교, 순천시청으로 이어지는 연계 육성을 통해 승승장구하고 있다.
정구는 서양의 테니스를 동양인의 체격에 맞게 라켓을 개량하고 부드러운 고무공을 사용하게 만들어 1885년경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현 동경교육대]에서 시작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 초에 보급된 것으로 추정되며, 순천에서는 1920년경 일본 유학생 정문기가 정구를 처음 선보였다고 한다. 그 후 정종호[후위]와 하동식[전위]이 조를 이뤄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당시 구종태와 임철호 등도 지역대표로써 명성을 떨쳤다. 2019년 현재 순천의 정구팀은 순천남초등학교, 순천북초등학교, 순천삼산중학교, 순천여자중학교, 순천매산고등학교, 순천대학교, 순천시청에서 창설· 육성 중이며 이들은 매년 전국대회를 비롯한 많은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이뤄낼 뿐 아니라 국가 대표를 배출하여 국위선양을 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