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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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炳魯祖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산정리 |
집필자 | 양상화 |
현 소재지 | 김병로 조상 묏자리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산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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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산정리에 있는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김병로의 조상 묏자리.
[개설]
김병로(金炳魯)[1888~1964]는 1888년 1월 27일 순창에서 태어났다. 호는 가인(街人)이며, 우리나라의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1913년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한 후 191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6년 경성 법학 전문학교 조교수, 1917년 보성 전문학교 강사를 거친 뒤 1919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 변호사 협회 회장과 조선인 변호사 회장을 역임하면서 왕성한 법정 투쟁을 하였다. 3·1 운동 사건을 비롯하여 단천 사건, 간도 사건, 정의부 사건, 광복단 사건, 105인 사건, 흥사단 사건, 안창호(安昌浩) 사건 등 매년 100여 건에 달하는 변론으로 독립투사 구출에 진력하였다.
또한 민족정기 앙양과 인권 옹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북풍회(北風會) 창설을 비롯하여 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신간회에 관여하여 민족 항쟁 운동에 나섰다. 1945년 한국 민주당의 대표 총무 위원을 지냈고, 이듬해 남조선 과도 정부의 사법 부장,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대법원장 겸 법전 편찬 위원장으로서 법질서 확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55년 고려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2년 문화 훈장 대한민국장과 건국 공로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국민당을 창당하는 등 재야 정당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항상 후배 법관들에게 청렴과 강직을 강조한 김병로는 소신 있는 법관, 강직한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철저히 지켰으며 해박한 법률 지식의 소유자였다. 1964년 1월 13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양마 입구의 명당]
가인 김병로가 큰 인물이 된 것은 11대 할아버지인 자연당 김시서(金時瑞)와 묘 아래 김시서의 증손자 김방즙(金邦楫)의 묘의 영향을 받아서라고 전해 온다. 김시서의 묘는 순창군 복흥면 산정리 외양실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말이 외양간에 들어가는 형상의 천마입구(天馬入口) 형상이라고 하나, 양마입구(良馬入口) 형상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한다. 말머리가 하늘을 향하듯 산이 높게 솟아야 천마인데, 내오 마을 외양실은 혈처가 낮게 형성되어 천마입구보다 순하게 말이 외양간으로 발을 들여놓은 형상인 양마입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당 김시서의 묘에서 삼태성(三台星) 안산(案山)[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이 보이는 것으로 보면 큰 인물이 세 명이 나올 것으로 보아 김병로를 비롯하여 앞으로 두 명의 큰 인물이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태성이 있다는 것은 문과 급제자가 세 명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낙덕정(樂德亭) 옆에 있는 김병로의 조부모 묘도 가히 명당으로 보인다. 낙덕정이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는 듯한데, 조부모 묘의 용이 여의주를 입에 거의 닿아 차지하는 형상을 하는 이룡쟁주(二龍爭珠) 형상이다. 조부모 묘의 발복으로 당대에 김병로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