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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728
한자 柳村里碑石-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586-1[유촌 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진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53년 - 서준여 출생
현 소재지 유촌리 비석 떼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586-1[유촌 마을]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홍순응(洪淳應)|서병홍(徐炳泓)|서준여(徐俊汝)|전주 이씨(全州李氏)
재질 화강암|오석
크기(높이,너비,두께) 참봉 홍공 순응 유혜비 비신 115㎝[높이]|43㎝[너비]|16㎝[두께], 서 효자 병홍 지비 비신 122㎝[높이]|48㎝[너비]|16㎝[두께], 고 서 효자 준여 지비 비신 107㎝[높이]|46㎝[너비]|20㎝[두께], 효열부 전주 이씨 기적비 비신 156㎝[높이]|58㎝[너비]|27㎝[두께]
소유자 유촌리
관리자 유촌리 이장 서정실[063-652-3503]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및 현대 효자·효열부 등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개설]

이천 서씨(利川徐氏) 족보에 따르면 서병홍(徐炳泓)의 자는 경수(景洙·景燧)이고, 호는 지선당(止善堂)이다. 공조 판서 서숭로(徐崇老)의 후예로 아버지는 서준규(徐俊奎)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이 나면 하늘에 대신 죽기를 빌었고,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서럽게 울어 피를 토하다가 기절한 뒤 소생하였다. 시묘를 할 때는 근심스럽게 3년 동안 울면서 예를 다하였다. 낮에는 단 위에서 울고, 밤에는 단 아래에서 울어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아 감동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순창 군지』에는 아버지 병에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였으며, 어머니 병에는 다리 살을 베어서 드시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향교의 유림과 도백이 추천하여 동몽교관 조봉대부 겸 예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서준여(徐俊汝)는 족보에 의하면 자가 중삼(重三)이고, 1853년[갑인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지보(徐址輔)이다. 어버이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하였고, 병이 심하였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고 정강이 살을 도려내 드려 6년을 더 살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을과 도백이 서로 천거하여 4장관의 통문이 있어 정려를 받게 되었다. 서준여의 묘는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 임좌(壬坐)에 있다. 그리고 참봉 홍순응 유혜비가 있으며, 근래에 세운 효열부 전주 이씨 기적비도 있다.

[건립 경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어귀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참봉 홍공 순응 유혜비(參奉洪公淳應遺惠碑)와 이 마을에 살았던 서 효자 병홍 지비(徐孝子炳泓之碑), 고 서 효자 준여 지비(故徐孝子俊汝之碑), 효열부 전주 이씨 기적비(孝烈婦全州李氏紀跡碑)가 있다. 참봉 홍공 순응 유혜비는 1919년 마을 주민들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세웠으며, 서병홍과 서준여의 효자비, 효열부 전주 이씨 기적비는 효자 및 열녀의 행적을 기념하여 세웠다.

[위치]

유촌리 비석 떼는 순창 읍내에서 동쪽으로 유등면 건곡리유등면 행정복지센터를 지나서 유촌 대교 건너 유촌리 어귀에 있다. 주소지는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586-1번지이다.

[형태]

4기의 비석 모두 화강암과 오석(烏石)으로 제작되었다. 좌측부터 첫 번째 참봉 홍공 순응 유혜비는 좌대 높이 70㎝, 너비 40㎝, 두께 15㎝이며, 비신 높이 115㎝, 너비 43㎝, 두께 16㎝이고, 개석 높이 73㎝, 너비 40㎝, 두께 32㎝이다. 기미 사월이라는 기록을 통해 1919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서 효자 병홍 지비는 좌대 높이 74㎝, 너비 50㎝, 두께 17㎝이며, 비신 높이 122㎝, 너비 48㎝, 두께 16㎝이고, 개석 높이 76㎝, 너비 49㎝, 두께 46㎝이다.

세 번째 고 서 효자 준여 지비는 좌대 높이 71㎝, 두께 47㎝, 너비 30㎝이고, 비신 높이 107㎝, 너비 46㎝, 두께 20㎝이며, 개석 높이 74㎝, 너비 50㎝, 두께 38㎝이다. 네 번째 효열부 전주 이씨 기적비는 좌대와 개석은 화강암이고 비신은 오석을 사용하였다. 특히 개석은 꽃잎 모양 같은 조각을 하였다. 좌대 높이 90㎝, 너비 50㎝, 두께 25㎝이고, 비신 높이 156㎝, 너비 58㎝, 두께 27㎝이며, 개석 높이 90㎝, 너비 70㎝, 두께 60㎝이다.

[금석문]

참봉 홍공 순응 유혜비는 전면에 공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시로 지어 기록하였다.

의아홍공(猗我洪公)[아! 우리 홍공이여]

신가덕인(信可德人)[진실로 덕인이네]

감세정렴(減稅精斂)[감세하고 정확하게 거두며]

주궁형빈(賙窮恤貧)[궁빈한 자를 구휼하였네]

만목관감(萬目觀鑑)[많은 사람의 거울이 되며]

중구풍비(衆口豊碑)[많은 사람이 비석을 세우자네]

첨피화악(瞻彼華嶽)[저 화산을 바라보며]

편석재자(片石在玆)[빗돌을 이곳에 세웠네]

서 효자 병홍 지비는 문장가인 행주 기씨(幸州奇氏) 기우만(奇宇萬)이 1915년 10월에 찬하고 족질(族姪) 서정표(徐廷杓)가 썼다. 화강암 재질이 오랜 세월 마모되어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고 서 효자 준여 지비는 간지에 “1915년[숭정 기원 후 5주 을묘] 10월에 행주 기씨 기우만이 찬하고 족질 정표(廷杓)가 삼가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음기(陰記)는 너무 낡아 판독하기 어렵다.

효열부 전주 이씨 기적비에는 “효열부 전주 이씨는 회안 대군 이만복의 딸로 이천 서씨 절효공 서능(稜)의 후손인 사인 서판보의 처이다. 부인은 하늘이 내린 품성이 유완(柔婉)하고 효순(孝順)하였으며, 출가하여 시부모를 효로써 섬겼고 진실로 남편도 섬기니 향당에서 칭송이 있었다. 1998년 태인 허철수가 글을 짓고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참봉 홍순응 유혜비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낮은 담을 두르고 철문을 달았으며, 담장 안 앞쪽에 2그루의 산수유와 뒤쪽에 2그루의 배롱나무를 심었다. 서 효자 병홍 지비와 고 서 효자 준여 지비는 약 1m 되는 시멘트 블록을 사용하여 담을 친 후 2기를 나란히 모셨다. 효열부 전주 이씨 기적비는 2단의 좌대로 되어 있고 화강암 기둥을 세워 둘렸으며 바닥은 돌을 깔았다. 유촌리 마을 이장이 관리를 맡고 있다.

[의의와 평가]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이천 서씨의 집성촌으로 충주 목사를 지낸 서영우가 입향하여 번성할 때는 약 200 가구를 넘었고 2013년 현재도 약 100가구가 살고 있다. 유촌리의 유혜비와 효자비, 열부비는 마을의 깊은 역사성을 말해 줌과 동시에 마을의 풍속을 정화하는 데 기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1.16 현행화 [위치] 사무소→행정복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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