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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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豊饒-農謠-金果- |
이칭/별칭 | 순창의 소리 문화와 금과 모정 들소리,금과 들소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 |
집필자 | 유장영 |
[개설]
순창은 맑고[淳] 창성[昌]한 땅이다. 순창은 예로부터 옥천(玉川)·순화(淳化) 등으로 불릴 만큼 물이 맑고 순박하며, 절경이 많고 인심이 후덕하여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순창은 전라북도 동남부 산간 분지에 속하지만, 예로부터 풍부한 농경 생산 덕택에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자연환경이 수려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알려졌다. ‘생거순남(生居淳南) 사거임실(死居任實)’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서는 순창·남원이 좋고, 죽어서는 임실이 좋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생거장성(生居長城) 사거순창(死居淳昌)’이라는 말도 있다. 살아서는 장성이 좋고, 죽어서는 순창이 좋다는 말이다. 이렇게 순창은 ‘살아 살기에 좋고, 죽어 살기에도 좋은 곳’이다.
오늘날에도 전국의 풍수가들이 명당처 중 한 곳으로 꼽는 고장이 바로 순창이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순창에 독특하고 풍요로운 소리 문화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순창 지역 곳곳에는 논농사와 관련된 많은 민요가 전해 내려온다. 특히 순창의 들판에서 불리던 민요는 그 종류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장단이며, 악조가 대단히 다채롭게 발달되어 있다.
[순창의 소리 문화]
순창은 소리의 고장이다. 판소리로 예를 들자면 순창은 동편제 판소리의 거두였던 김세종(金世宗)[1825~1898]을 비롯하여 장재백(張在伯)[1849~1906], 장판개(張判盖)[1885~1937] 등을 배출한 곳이며, 동시에 서편제 판소리의 비조였던 박유전(朴裕全)[1835~1906]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동편제의 고장이면서 동시에 서편제의 탯줄이 되었던 곳이다.
남원의 지리산 아래에서 송흥록(宋興祿), 유성준(劉成俊), 김정문(金正文) 등의 명창이 나왔다면, 고창의 방장산 아래에서 신재효(申在孝)[1812~1884], 진채선(陳彩仙)[1847~?], 김소희(金素姬)[1917~1995] 등의 명창이 나왔고, 순창의 회문산 아래에서는 김세종, 박유전, 장재백, 장판개 등의 명창이 배출되었다. 회문산은 전라북도의 아버지 산으로서 완주의 모악산이 어머니 산에 해당한다. 또한 회문산은 북쪽의 모악산과 남쪽의 광주 무등산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순창 소리는 동서편의 장점만을 취한 가장 세련된 소리로 일컬어지는 보성 소리의 원 탯줄이 되었다. 이러한 순창에서 불리는 농가 소리 역시 판소리 음악의 양대 악조로 일컬어지는 우조와 계면조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판소리 음악의 전통을 기층 음악인 농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순창의 민요에 내재된 장단을 분석해 본 결과, 비록 판소리에서처럼 규칙적인 균등 박자로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판소리의 주요한 네 가지의 장단 틀인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이 고루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민요에는 세마치장단도 많이 사용되는데, 일부 학자는 세마치장단에서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장단이 파생되어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마치장단은 중모리장단과 동시에 연주가 가능한 장단이다. 예를 들어, 판소리의 「농부가」와 같은 「모심기 소리」에서는 혼자 부르는 메기는 소리에서는 중모리장단으로 반주하는데, 이것은 차분한 느낌을 준다. 여럿이 함께 어울려 부르는 받는 소리는 세마치장단으로 반주하는데, 이는 보다 흥겨운 느낌을 준다.
이러한 순창 지역의 민요를 살펴보면, 순창군은 지리적으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동시에 전라도 서부 평야와 동부 산간의 중간에 위치함으로써, 도로와 하천을 따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가운데 오히려 보다 다양하고 독특한 소리 문화의 특성을 낳은 고장임을 알 수 있다.
[금과면은 어떤 곳인가?]
금과면(金果面)은 백제 시대에는 도실이었으며, 1314년(충숙왕 원년)에 금동방과 목과방이었고, 1914년 지방 행정 구역 개편 때에 금동면(金東面)과 목과면(木果面)을 합쳐 지금의 금과면이 되었다.
금과면은 13개 법정리, 24개 행정리, 26개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91년도에는 878세대에 2,264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1983년에는 1,960세대에 5,110명의 주민이 거주하였으니, 주민이 반 이상 줄어든 것이다. 금과면의 총면적은 27.29㎢이다. 그중 전(田)이 3.38㎢, 답(畓)이 6.47㎢, 과수원이 0.02%, 대지는 0.54%, 그리고 임야가 13.68㎢를 차지한다.
금과면의 경지율은 35%이다. 전라북도의 경지율이 31%이기 때문에 금과면의 경지율은 전라북도 평균보다 4% 높다. 금과면의 전체 농지에 대한 논의 비율은 65%이다[전라북도의 전체 농지에 대한 논의 비율은 75.2%]. 금과면은 주로 논농사를 통한 미곡 생산[722만㎡]에 의존하며, 과수 생산 중에는 배[26만㎡]가 으뜸을 차지한다.
순창의 서남부에 위치한 금과면은 북쪽으로는 순창읍과 팔덕면, 동쪽으로는 풍산면과 경계를 이룬다. 또한 서남쪽으로는 전남 담양과 경계를 이룬다.
금과면은 아미산(蛾眉山)[515m]을 주산으로 한다. 금과면은 동서남북이 모두 산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덕진산(德進山)[380m]이 팔덕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북쪽으로는 금과면의 주산인 아미산이 있어 순창읍과 경계를 이루며, 서남쪽에는 서암산(瑞巖山)[450m]이 전라남도 담양과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으로는 설산(雪山)[522.6m]이 있어 곡성군 옥과면과 경계를 이룬다. 금과면의 하천은 모두 금과면 안에서 발원하여 흐르니, 금과 주민들은 외지의 물에는 한 방울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금과의 물만 먹고, 그 물로 농사짓는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금과면 모정리(茅亭里)는 순창읍에서 약 7.7㎞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고려 시대에는 마을에 맷돌 형상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마암(磨巖)이라 불렀고, 조선 시대에는 매우(梅宇)라 불렸다. 마을 뒷산이 매화꽃이 만발한 형상이라 하여 혹은 회문산[어떤 이는 덕진산]의 매화꽃이 마암 마을에 떨어져[梅花落地] 그때부터 매우라 불렀다고 한다. 매우골은 세 개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밧매우·중매우·신매우 등이 그것이다. 밧매우는 정자[삼외정] 밖에 위치한 매우 마을이라는 뜻이며, 중매우는 중간에 있는 매우 마을, 그리고 신매우는 새로 생긴 매우 마을이라는 뜻이다. 1914년 일제가 이름을 모두 외모·중모·신모 등으로 바꾸었고, 이를 합하여 모정리라고 개칭하였다. 2008년에 다시 매우리(梅宇里)로 바꾸었는데, 매우리는 금과면의 면 소재지이다.
밧매우[밭매우]는 광산 김씨, 중매우는 설씨와 홍씨, 신매우는 홍씨가 각각 대종을 이뤄 마을을 형성하였다. 특히 남양 홍씨(洪氏)가 약 80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는데[1930년 80호, 1989년 24호], 소위장군(昭威將軍) 홍윤희(洪允熙)가 16세기 초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그의 처가인 순창 설(薛)씨를 따라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세조 때에 단종 복위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하향하여 이곳으로 들어왔으며, 마을 사람들은 홍윤희를 이 마을의 입향조로 생각한다. 남양 홍씨는 3명의 문과 급제자와 수 명의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해 순창의 명문 중 하나로 꼽힌다.
중매우의 서쪽 입구 언덕의 바위 위에는 삼외당(三畏堂)[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 161번지]이라는 정자가 있다. 삼외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 마을 충신 홍함(洪函)[1543~1593]이 젊었을 때 지었으며, 정자 이름은 바로 홍함의 호이다. 삼외당은 당대의 명현 절사들과 교류하면서 시문과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또한 중매우는 1511년(중종 6) 무렵에 채수(蔡壽)[1449~1515]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본[한문본을 번역한 것]인 「설공찬전(薛公瓚傳)」의 배경이 된 마을로도 유명하다.
이곳이 예전에는 마암으로 불렸다는 것은 앞에 기술한 바 있거니와, 큰 맷돌같이 생긴 바위는 이 마을에 큰 인물이 태어나면 반드시 한 바퀴씩 회전한다고 전해 내려온다. 이렇게 신령스런 바위 옆에는 커다란 정자나무[팽나무]가 서 있으며, 최근까지도 발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이 바위에 왼새끼를 꼬아 두르고 치성을 올렸다고 한다.
매우리[모정리]는 현재 총 97가구[중매우 50, 신매우 21, 맛매우 26], 270명[남 119, 여 151]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순창군 금과면 지역은 전라북도 서부 평야 지역에 비해 밭농사를 많이 짓기는 하지만 여전히 논농사가 주가 되는 답주전종(畓主田從)의 노동권으로 분류된다. 금과면에서 불리는 농가 소리[농요]는 「물푸기 소리」, 「모찌는 소리」, 「모심기 소리」, 「김매기 소리」, 「장원질 소리」 등이 있다.
전라북도 서부 평야 지역의 농요가 산업화와 함께 일찍 소멸되거나 불완전하게 전승되고 있고, 동부 산간 지역의 농요는 단순 소박하며 미분화 상태에 머물고 있다. 이에 반하여 임실·순창·남원 등의 동부 산간 분지 지역에서 불리는 농요는 오늘날에도 전승 상태가 양호하며 곡조의 분화와 함께 음악적 내용이나 가창 방식 등에서도 다양한 층위와 내용을 담고 있다
[금과 들소리와 판소리의 비교]
산 하나만 넘고 물줄기 하나만 건너도 문화는 달라진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가장 각광받는 판소리 법제는 보성 소리이다. 보성은 지리적으로 남원-구례-순천으로 연결되는 지형과 순창-담양-광주-나주-영암으로 이어지는 지형의 가운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산간 지역과 평야 지역이 만나는 중간인 보성에서 동편 소리와 서편 소리가 만나 가장 섬세하고 다양하며 치밀하게 짜인 소리라는 평가를 받는 보성 소리가 탄생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금과면에서 가장 가까이 이웃한 전라남도 담양의 농요는 「금과 들소리」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담양의 논매는 소리[담양군 월산면 월계리 복정 마을]에는 「사소리」, 「방개 소리」, 「매화 타령」[「장원례 소리」], 「사뒤요 소리」, 「어하질로」 등이 있다. 이중 제일 마지막에 부르는 「어하질로」의 메기는 소리[‘미 음계’]를 제외한 나머지 소리들은 모두 솔·라·도·레·미의 ‘솔 음계’로 되어 있다. 이것은 흔히 경조 혹은 경토리라 불리는 선율이다. 따라서 담양의 농요에는 금과 농요와 같이 판소리의 우조와 계면조가 균형이 잡혀 있지 않고, 하나의 선법[경조, 우조]이 지배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하겠다.
판소리 음악의 배경을 기층 음악인 농가 소리에서 실증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즉 동편제 판소리에서 주장하는 우조와 서편제 판소리에서 주장하는 계면조가 「금과 들소리」에 골고루 섞여 있으며, 또한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의 주요 장단 틀이 그대로 농요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순창 지역 농요에 판소리 우조와 계면조의 양대 선법이 골고루 섞여 있음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라북도 동부 산악 지역의 농요는 주로 메나리조로 불리고, 서부 평야 지역의 농요는 주로 남도 육자배기조로 불리기 때문이다.
[금과 들소리의 전승 현황]
금과면 매우리는 순창 군내에서도 들소리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금과 들소리」는 특히 2002년 제43회 한국 민속 예술 축제에서 종합 최우수상[대통령상]을 받아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 이후로 금과 들소리 보존회 사무실을 새로 만들어 더욱 열심히 들소리를 보존·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순창의 「금과 들소리」는 2005년 3월 11일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940년 순창에서 태어난 이정호는 「금과 들소리」의 선소리꾼이다. 박홍규, 양학구, 설동근 등에게 들소리를 사사받았다. 전북 예술 경연 대회, 전국 민속 예술제, 전국 민요 경창 대회, 전국 시조 가사 경창 대회 등 다수 대회에서 입상하였다.
500여 년 전부터 모정을 중심으로 동전·대장 들녘에서 불리던 「금과 들소리」에는 힘든 농사일을 상호 부조의 품앗이를 통하여 극복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소박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금과 들소리의 음악적 특징]
「금과 들소리」의 음악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두 개의 주요한 악조인 우조·계면조 등의 음계와 선법이 금과 들소리에 고루 섞여 있다는 점이다. 전라북도 동부 산악 지역의 민요는 대개 메나리조로 짜여 있고, 서부 평야 지역의 민요는 대개 남도 육자배기조로 짜여 있다. 이에 반하여 동남부 산간 분지에 속하는 순창군의 민요는 우조와 계면조가 고루 발달해 있으며, 「금과 들소리」도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며 두 악조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둘째, 전라북도 서부 평야 지역 들노래의 가창 방식이 주로 선후창 방식으로 불리며, 동부 산악 지역의 들노래는 주로 교환창 방식으로 불린다. 이에 반하여 동남부 산간 분지에 속하는 순창 지역의 들노래는 선후창 방식과 교환창 방식, 그리고 제창 방식이 고르게 섞여 있다는 점이다.
셋째, 「금과 들소리」는 특히 김매기 과정에서 일의 분화에 따른 곡조의 분화가 매우 다채롭다. 인근의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학촌 마을에서 전해지고 있는 들노래 9곡 중에서 8곡이 논매는 소리에 해당할 정도로 김매기 과정에서의 곡조 분화는 순창 들노래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넷째, 「금과 들소리」의 「김매기 소리」는 우조 선법을 중시하면서도 창법상으로는 대체적으로 기식음(氣息音)을 풍부하게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씩씩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식음[하·허·흐·해·후·히]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들소리를 더욱 씩씩하고 힘찬 느낌을 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