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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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也洞雩祀壇址 |
영어공식명칭 | Daiya-dong Ritual Ceremony Site for Rain |
이칭/별칭 | 소래산 우사단지,인천부 우사단지,우사단 터,제터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산140-11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방문식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1년 -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대야동 우사단지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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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산140-11 |
성격 | 기우제 터 |
[정의]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기우제를 지냈던 터.
[개설]
대야동 우사단지(雩祀壇址)는 소래산 능선에 있으며 조선시대 인천부의 우사단(雩祀壇) 터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이곳의 지표에는 제단의 구체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빙하는 문헌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곳에 석렬(石列)로 단을 쌓은 모습이 있고 주변에서 유물이 수습되고 있다. 또한 지역 사람들은 제터골[제지곡(祭址谷)]이라 하여 제사 유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방의 우사단 터로 추측되고 있다.
[변천]
우사단이란 기우제의 일종인 우사를 지내던 제단을 말한다. 우사란 명칭은 의례를 치를 때 '우~' 하는 탄식 소리를 내면서 비를 빈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우사는 매년 정해진 시기나 가뭄이 있을 때 치러졌다. 비를 내려주는 신은 제사 주체에 따라 달랐다. 천자는 하늘의 신, 제후는 상고시대의 영웅신이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기록이 남아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는 기우제 명칭으로 대우(大雩)·재우(再雩) 등 우(雩)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 제단으로 우사단이 처음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 따르면 1414년(태종 14) 제사 대상, 제단의 기준과 위치, 제물 등을 정하였다. 세종 대에도 정비를 거듭하여 우사단 기우제는 국가의 제사 등급에서 중사(中祀)로 정하였으며, 상세한 의례 절차를 「우사단기우의(雩祀壇祈雨儀)」로 정리하였다. 1704년(숙종 30)에는 수시로 지내던 기우제를 12차로 고정하였는데, 이 중 우사단에서 대체로 3차와 8차의 기우제가 치러졌다.
조선 후기에 들어 지방에도 기우제단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31개소가 확인된다. 지방에서 기우제는 성황사(城隍祠), 사직단(社稷壇), 산천단(山川壇)에서도 행해졌다. 그러나 이는 기우제 전용의 공간은 아니었다. 반면 기우제단은 기우제 전용의 제단이었기에 중앙의 예에 따라 우사단으로 불리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천부의 우사단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치]
대야동 우사단지는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산140-11 일대에 있다. 대야동 사지(寺址)와 대야1동 노인회관 사이에 있는 약수터에서 남쪽으로 약 40m 지점에 있다. 약수터는 대야동 상대야리에서 등산로를 따라 병풍바위를 향해 올라가면 나온다. 약수터 위로 제터골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 일대가 우사단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대야동 우사단지는 1991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시행한 지표 조사에서 발견되었다. 보물 제1324호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 입상(始興蘇萊山磨崖菩薩立像)과 대야동 사지와 멀지 않은 능선에 있다. 때문에 대야동 문화 유적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한 지표 조사 또는 현장 조사 때마다 관련 정보가 보고되고 있으나, 정밀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1995년 시흥시, 2000년 기전문화재연구원[지금의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시흥시의 문화 유적을 개괄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일환에서 현장 조사가 이루어지고 유적 일대에서 유물을 수습하여 보고하고 있는 형편이다.
[출토 유물]
유물은 조선시대 백자와 기와 조각이 수습되었다. 백자 대접 밑바닥의 일부가 수습되었는데, 전면에 회갈색 유약이 남아 있으며 광택이 양호하다. 태토(胎土)[바탕흙]는 잡물이 섞이지 않은 치밀질(緻密質)을 사용하였다. 기와는 선문 수키와, 복합문 암키와 등이 발견되었다. 수키와는 경질 회청색 계통이고, 등면은 짧은 사선의 집선문(集線文)이 새겨져 있다. 내면은 포흔(布痕)[기와를 빚을 때 기와틀에 씌운 마포(麻布)의 흔적] 위에 솔질한 흔적이 있다.
기와의 분할 면은 와도(瓦刀)로 반 이하를 내리긋다가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암키와는 등면이 변형 생선뼈무늬[어골문(魚骨文)], 격자문(格子門), 민무늬[무문(無文)] 등이 섞여서 나왔다. 내면은 포흔 위에 솔질 흔적과 물질 흔적이 보이며 건장치기[기와 정형 작업]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분할 면은 수키와와 마찬가지로 와도로 내면에서 내리 긋다가 분할한 것으로 보인다.
[현황]
현재 우사단 터가 있었던 곳에 석렬로 단이 있고 평탄하게 정지해 놓았다. 다른 부속 시설은 없으며 관련된 자세한 안내표지나 문구는 없는 편이다.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제터골이라고 부르고 있어 마을 주민들은 제사 유적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시흥시 대야동에 우사단이 있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점은 유적의 성격과 정체성을 확증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조선 후기 전국의 기우제단이 31개소이며, 그중 경기도 지역은 12개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흥 지역을 비롯한 인천광역시의 기우제단이나 우사단에 대한 문헌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추정하건대 국가나 관에 의해 공인된 곳이라기보다 마을 주민이나 지역 관아 등 지역적 차원에서 비가 오기를 비는 장소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