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농민 항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17
한자 壬戌農民抗爭(星州)
영어공식명칭 1862 Years Peasant Uprising
이칭/별칭 1862년 성주 민란,임술 농민 항쟁,농민항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62년 3월 26일연표보기 - 1862년 농민 항쟁 발생, 읍내 모래사장에서 읍회를 열고 12개조 요구
종결 시기/일시 1862년 5월 13일연표보기 - 1862년 농민 항쟁 종결, 선무사 이삼현을 파견하여 민란 수습
발단 시기/일시 1862년 3월 26일 - 1862년 농민 항쟁, 성주의 폐막을 요구
전개 시기/일시 1862년 4월 12일 - 1862년 농민 항쟁, 환폐·결폐·군폐의 시정 요구, 지주·부농·양반을 공격
발생|시작 장소 1862년 농민 항쟁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지도보기
종결 장소 1862년 농민 항쟁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격 농민 항쟁
관련 인물/단체 이발|이참|이원조|이삼현

[정의]

1862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

[개설]

1862년 농민 항쟁은 1862년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읍폐 해결과 개혁을 요구하며 일어난 성주 지역의 농민 항쟁이다. 1862년 3월 26일 몰락 양반 이발(李浡)과 이참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성주의 폐막(弊瘼) 해결을 요구한 12개 조의 요구 사항을 감영에 올리고, 탐학한 이서의 집 5호 및 서리와 결탁하여 치부한 자들의 가옥 등 32호를 파괴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 같은 해 4월 12일에도 500명~600명의 군중들이 환폐(還弊)·결폐(結弊)·군폐(軍弊)의 시정을 요구하며 지주·부농·양반들을 공격하였다. 5월 13일 조정에서 파견된 선무사 이삼현(李參鉉)이 시정을 약속함으로써 수습되었다.

[역사적 배경]

임술년(壬戌年)인 1862년에 경상도의 단성(丹城)·진주(晉州)를 비롯하여 전국의 70여 고을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지역별로는 경상도가 19개 지역, 전라도가 36개 지역, 충청도가 11개 지역, 기타 3개 지역 등으로 주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는 3월 26일과 4월 12일에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른바 1862년 성주 민란(星州民亂)이었다.

[경과]

1862년 2월 진주에서 대규모 농민 항쟁이 발생하자, 성주에서도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통문이 살포되었다. 3월 26일 성주 지역의 농민들이 대구 감영에 성주의 폐막을 요구함과 동시에 읍내 모래사장에서 읍회(邑會)를 열고, 읍내를 향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몰락 양반인 이발과 이참을 중심으로 12개 조의 요구 사항을 만들었는데, 전세(田稅)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서리 등 불법적인 가렴(苛斂)도 문제 삼았다. 군중들은 탐학한 이서의 집 5호 및 각 면 서리와 결탁하여 치부한 이들의 가옥 등 32호를 파괴하고, 30여 호의 재물을 탈취하였다. 감영이 봉기의 확대를 우려해 시위대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겠다는 관문을 보냄으로써 1차 봉기는 하루 만에 끝났다.

경상북도 성주의 주변 지역인 선산[4월 2일], 개령[4월 7일], 인동[4월 9일] 등지에서도 민란이 이어졌다.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성주 지역의 농민들도 4월 12일에 다시 봉기하였다. 빈농층과 소상인 및 유민들의 주동하에 500명~600명의 군중들이 참가하여, 환폐·결폐·군폐의 시정을 요구하며 지주·부농·양반들을 공격하였다. 5월 13일 조정에서 파견된 선무사 이삼현이 30냥에 달하던 결가를 8냥으로 인하하도록 조처하고, 허류곡(虛留穀)의 탕감과 군포 제도(軍布制度)의 개혁을 조정에서 논의하여 시행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봉기는 수습되었다.

[결과]

1862년 3월 26일과 4월 13일 농민 항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성주 출신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朝)[1792~1871]가 농민 항쟁을 직접 경험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조야(朝野)의 의견을 구하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있으면서 「삼정순막후진소회소(三政詢瘼後陳所懷疏)」를 올려 삼정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1863년에는 「청감본주하납미소(請減本州下納米疏)」를 올려 향리 성주의 하납미(下納米)와 하납목(下納木)을 반으로 줄여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1862년 삼남의 농민 항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농민 항쟁을 직접 경험했던 이원조가 읍폐의 해결을 위해 직접 청원에 나선 것이었다. 성주에서는 1883년에 이방(吏房) 추천권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의의와 평가]

1862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성주의 농민 항쟁은 성주 지역의 읍폐를 해결하기 위한 농민들의 개혁 요구였고, 이후 1883년 농민 항쟁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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