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록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06
한자 李昌祿事件
영어공식명칭 I Changrok Sageon|Case that I Changrok Critized King Gwanghae and the Government
이칭/별칭 이창록 성주지옥(李昌祿星州之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이창록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615년연표보기 - 이창록 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이창록 사건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이창록 사건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창록|광해군|정인홍|정구|이이첨|박이립|정활|성변규|옥금|남명학파

[정의]

조선 후기 광해군 때 성주 사족 이창록이 시국을 비판하다가 정인홍의 고발로 처형된 옥사 사건.

[개설]

이창록(李昌祿) 사건은 1614년(광해군 6)에 성주 지역의 사족이던 이창록이 광해군의 폭정과 조정의 난정(亂政)을 비판하는 소초(疏草)를 작성했다가, ‘흉서난언패역부도서(兇書亂言悖逆不道書)’라는 죄목으로 참형당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광해군 대의 대북(大北) 정권 때 광해군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동복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永昌大君)도 죽여 시형살제(弑兄殺弟)에 비견되는 등 윤리성 시비 문제를 야기하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사류(士類)들이 각자의 처지에 따라 분분한 의견들을 제기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당시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 정권은 왕권이나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토로하는 자는 모조리 찾아서 엄하게 벌을 주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경과]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제자인 성주 사족 이창록은 글재주와 학식이 뛰어나고 지조가 곧았다. 손에서는 항상 책을 놓지 않았으며 글 읽기와 글짓기를 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광해군 대에 왕의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 대군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자, 주위 사람들에게 통분해하는 발언을 하며 잘못을 간하는 상소를 올릴 준비를 하였다.

이창록과 사이가 나빴던 자가 이 사실을 정인홍(鄭仁弘)에게 고하여 큰 옥사로 확대되었다. 박이립(朴而立)이 개입되어 있었고, 정활(鄭活), 성변규(成卞奎) 등의 남명학파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정인홍은 역모로 규정하여 다스리면서 기회로 삼아 정구까지 엮어 넣으려고 하였다. 정구와 정인홍의 학문적·정치적 갈등에다 향촌 사회의 주도권 다툼까지 연계시키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실제 이이첨(李爾瞻)은 이창록이창록의 첩을 꾀어 정구를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창록의 첩인 사비(私婢) 옥금(玉今)은 이창록의 상소 시도가 정구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거짓 진술하면 지아비와 함께 살려줄 것이라는 회유에도 응하지 않았고,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강 선생은 전혀 관계되지 않았는데, 내 살기를 위해서 대군자를 모함하겠느냐”고 하면서 끝내 거짓 진술을 거부하였다.

[결과]

이창록은 참혹한 형벌 끝에 처형되었고, 이창록의 첩 옥금도 고문 끝에 옥사했으며, 성주인 100여 명이 함께 처벌되었다. 이창록의 가택과 적(籍)이 파괴·몰수되었고. 성주목(星州牧)신안현(新安縣)으로 강등되었다. 성주 사족들에게는 한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조처가 취해졌다가, 인조반정 후에 원상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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