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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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食生活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집필자 | 오영주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음식을 조리·가공·분배·소비하는 과정이나 먹는 음식에 관한 생활상의 신념과 관행.
[개설]
서귀포 지역의 식생활은 아열대 화산섬의 지형적 조건, 외세의 침공과 가계의 다문화, 토착신앙과 유교문화의 충돌, 중앙의 가혹한 공납과 억압 등 자연환경과 사회·인문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은 종합문화의 결정체이다.
오래 전 서귀포는 자연환경적으로 어로와 수렵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주민들은 열악한 농경 환경에서 농경에 크게 힘쓰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중세 탐라국 시대 이후 이곳은 먹거리가 궁핍한 섬이 되고 말았다. 풍재(風災)와 수재(水災), 한재(旱災)가 많아 늘 기근에 시달렸다. 화산섬 토지는 돌멩이로 가득하여 토심은 얇고 토질은 가벼운 화산재로 덮여 척박하기만 하였다. 먹고 살기 위하여 주민들의 냉엄한 자연환경에 맞선 싸움은 섬에서의 일상 그 자체였다. 서귀포 토양은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고, 하천도 홍수 때만 흐르는 건천이어서 물을 가두어 논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곡물은 밭에서 나는 보리·조·메밀이 전부였고, 그마저 소출량은 늘 적어 곡물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서귀포 주민들에게 밭은 뭍의 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을 앞에 펼쳐진 바다 속의 땅도 밭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해조류와 어패류가 풍부하여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여 주었다.
서귀포의 음식의 종류는 무려 400품이 넘는다. 그중에서 일상음식은 약간의 곡물에 해물이 들어간 밥·죽·범벅·수제비·떡 등이 대부분이다. 한라산 자락에서 나는 초근목피와 바다에서 나는 해초가 곡물에 조합되어 나온 결과물이다. 결국 서귀포의 일상음식은 부족한 곡물을 오래 견디어 내기 위한 장기성 구황음식이나 마찬가지이다.
[변천]
1. 이민족의 유입과 식생활
탐라국의 성주 체계 사회[936~1105] 이전에는 서귀포 지역 주민들이 자주적인 해상 활동을 통해서 외부의 식문화를 들여온 시기라고 한다면, 그 이후의 시기는 외부의 집단들이 섬으로 들어와 살면서 그들의 식문화를 섬 속에 뿌리를 내리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271년(원종 12)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와 약 2년 반 동안 항전하다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당시 군사들을 위한 단체 급식, 각종 의례 음식 등 일련의 음식 만들기가 행해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이 조리에 동참하여 육지의 음식 문화를 집단적으로 학습함으로써 고려 말 한식 문화를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삼별초가 진압된 이후 100여 년간 고려와 몽골의 원에 이중으로 귀속되어 양국의 정치적 지배를 동시에 받아야 했다. 초기에 몽골군 400명 주둔, 관리의 파견, 죄수의 귀양처, 원의 멸망에 따른 몽골 황금 씨족 80가구의 제주 안치 등 몽골족 집단의 오랜 유입은 이곳에 다문화 가정을 양산시켰다.
결과적으로 몽골 유목민족의 식생활 문화가 지역 원주민의 식생활 문화와 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몽골 아르키와 제주 고소리술, 아이락 또는 타락과 순다리, 참파와 보리개역, 오츠와 돔베고기, 보르츠와 육포, 타타르와 말고기 육회, 구릴타이슐과 칼국, 총가와 조베기, 반쉬와 만듸, 호쇼르와 물떡, 게데스와 돗수웨[순대], 랍샤와 고기죽, 슐루와 몸국[돼지국물], 우름과 황유, 꼬치구이적, 상애떡, 빙떡, 새끼회, 말고기 식용 문화, 추렴 문화, 고적[부조 문화], 내장고기 선호 문화, 사냥 문화 등에는 서귀포 지역 음식과 몽골 음식[14세기 몽골초원 복귀 전]의 동질성과 차별성이 존재한다.
2. 정치·경제적 수탈과 식생활
조선 시대 서귀포 주민의 식생활은 중앙정부의 가혹한 경제적 수탈과 거듭되는 흉년에 따른 기근의 식생활로 특징지어진다. 조선 건국 이후 조정의 마정(馬政)과 진상은 더욱 강화되어 중산간 농경지가 목장으로 소용되었다. 게다가 지역의 각종 명산물[감귤·전복·생선·미역·버섯·약재) 진상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지역민들이 자연과 사회의 주인이 되지 못한 탓으로 자기들이 생산한 먹거리도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더 나은 삶을 찾아 육지로 나가는 주민이 증가하자 1629년(인조 7)부터 약 200년간 국법으로 출륙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어업 활동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어획에서 얻은 해산물을 내다 팔고 다시 곡물을 얻는 생활 경제도 허물어지게 되었다.
흉년이 드는 해이면 먹거리가 크게 부족하여 기아자가 속출하였다. 조선조 18세기 말까지 400여 년 동안 제주 인구가 고작 5만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결과도 이에 연유한다. 조선 시대 서귀포의 식생활사는 기근의 역사이며, 먹거리를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 해도 그리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3. 의례의 변천과 식생활
『동국여지승람』[1486년]의 지지에 의하면, “제주도에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으며 남자무당도 많고 제를 지내는 당이 300여개나 된다. 차귀당에는 조개·술·고기를 신에게 바치면 또 구렁이나 독사를 모시는 곳이 많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15세기 이전부터 서귀포 토산당 등 당제에 제물을 드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귀포 지역의 무속음식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재료는 쌀밥·백미·백시루떡·백돌레떡·옥돔·채소[미나리·콩나물·고사리·미역)·감귤·좁쌀감주·술[오메기술·고소리술] 등이다. 특수한 제물은 주로 돼지고기인데, 한 마리를 잡고 삶아서 통째로 올리기도 하고, 그 일부나 내장의 일부를 올리는 경우도 있다.
무속의례는 지성을 드리는 것이므로 부정 관념이 존재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금기 음식의 전통이 전승된다. 금기를 준수하지 않으면 죄의 대가를 받는다고 여긴다. 금기 음식 중 육류에 대한 금기가 고기별로 나타난다. 한 번 먹었을 때의 부정 기간은 고양이고기가 9년, 말고기가 7년, 개고기가 3개월, 돼지고기가 1일의 순이다. 고기를 먹은 후 부정이 가시기 전에 굿에 참석할 경우 개고기가 3년, 그리고 돼지고기는 3년 동안 아프다고 한다. 또한 비늘이 없는 갈치·고등어·문어·가오리·멸치·멸치젓 등의 생선은 비린내가 난다고 하여 제물에서 제외되고, 먹으면 굿에 갈 수도 없다. 문어를 먹고 가면 문어 다리가 달라붙듯 귀신이 달라붙는다고 한다.
서귀포에 불교가 전래된 기록은 고려 시대의 일이다. 1034년(정종 원년) 이후부터 탐라의 토산물을 싣고 고려의 팔관회(八關會)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귀포에 크고 작은 사찰들이 세워지면서 채소 음식의 조리 및 가공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조와 보리를 주식으로 하고 해산물을 부식으로 먹었던 서민들에게 불교의 육식 절제 풍속은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어로를 하고 짐승을 추렴하고 산야의 꿩이나 노루를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조선 사회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제주로 발령받은 중앙 관리들은 무속신앙을 타파하고 유교식 통과의례의 규범화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서귀포는 무속신앙 때문에 유독 유교가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다. 유교가 서귀포에 널리 퍼진 것은 조선 후기의 19세기 이후이다. 특히 출륙 금지령이 해제된 후 서귀포의 유림 중에는 호남 지역으로 건너가 복잡한 『사례편람』을 학습해 오면서 예법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지금 상례나 기제사에 올라가는 떡[솔변·절변·제편·송편·강정·과질·우찍·중과·약과]은 19세기 이후에 일반화된 것이다.
4. 음식에 대한 사상
서귀포 주민들이 식생활을 영위하면서 지니게 된 음식에 대한 사상은 환경 친화성과 건강 친화성, 사회 친화성 등 총체적인 개념으로 해석된다.
첫째, 서귀포 식생활은 환경 친화적인 식사법이다. 서귀포 음식의 조리 시간은 매우 짧다. 식재료에 가능한 한 인간의 손질을 최소화하여 재료 자체의 신선한 맛을 중시한다. 단순하고 호쾌한 생식[물회·냉국·쌈 등]과 단순 조리 식생활법은 결과적으로 연료 소비량을 감소시킨다. 다른 지방의 음식에 비해서 열처리 시간은 대략 1/2정도 수준이어서 탄소 배출량이 적다. 또한 식생활 폐기물이 적어 환경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
서귀포 지역의 또 다른 식생활법은 일물전체식(一物全體食)이다. 가능한 한 폐기물을 줄여, 버리는 것 없이 다 먹는다. 식량이 부조한 시절 ‘ᄌᆞ냥정신’[절약 정신]은 생존을 위한 철학이었다. 쉬어 가는 보리밥마저 재활용하여 2차요리를 만들어 냈다. 식생활 폐기물[보리쌀 씻은 물, 생선 가시, 설거지하고 난 물, 농작물 폐기 부위 등등]도 버리지 않고 돼지 먹이로 사용하였다. 돼지우리와 식생활 폐기물의 연계는 서귀포의 ‘통시문화’, 즉 지속 가능한 재활용 시스템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둘째, 서귀포 식생활은 건강 친화적인 식생활법이다. 서귀포 속담에 “밥이 인ᄉᆞᆷ이여”[밥이 인삼이다]라는 말이 있다. 평상시에 밥을 요리조리 잘 지어 먹으면 보약이 별도로 필요 없다는 이야기이다. 서귀포 음식의 장점은 식재료의 절묘한 조합이다. 예전에 서귀포 지역은 늘 곡식이 부족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족한 곡물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넣어 배를 채워야 했다.
서귀포 지역의 밥은 잡곡[보리·조·콩·피쌀]·잡곡과 서류[고구마·감자]·잡곡과 채소류[무·쑥·호박], 그리고 잡곡과 해조류[톳·감태·너패·파래) 등 서로 돌려 쓸 수 있는 혼합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은 곡물과 생선 어패류를 혼합하는데, 전복죽·옥돔죽·깅이죽·오분자기죽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육류도 섞어 닭죽·말고기죽·꿩고기죽 등등을 만든다. 범벅은 메밀가루에 고구마나 해조를 넣는다. 국도 역시 옥돔무국·호박갈치국·성게미역국·몸국·고사리육개장·말고기무국 등등 마찬가지다. 한 가지 식재료에 맛과 영양이 부합되는 부재료를 찾아내어 궁합을 맞춘 요리들이다. 결국 서귀포 식생활은 식재료 간의 부족한 영양소를 상호 보완해 줌으로써 영양적 효용성을 극대화한 식생활법이다.
셋째, 서귀포 식생활은 사회 친화적인 식사법이다. 서귀포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모두가 다 함께 만들어 나누어 먹는, 나눔의 식문화를 소중히 한다. 집집마다 텃밭이 있고, 뒤편에는 야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밭이 있다. 계절에 따라 나오는 나물과 해산물이 다양하다. 식탁 자체가 계절을 말한다.
서귀포의 일상식은 ‘낭푼 밥상’[공동 밥상]이다. 낭푼 밥상에서 밥과 국의 상차림은 한식과 정반대이다. 밥은 큰 함지박에 퍼서 가운데 넣고 국은 제각기 따로 담아 낸다. 낭푼 밥상은 언제 누가 와도 국 한 그릇만 뜨면 함께 먹을 수 있는 공식(共食) 시스템이다. 일상 음식이 아닌 의례 음식은 반드시 이웃에 돌려가며 나누어 먹었다. 의례 음식은 고기나 생선, 두부 등과 같이 고단백 특별 음식이다. 비싼 고단백질 음식은 공식을 통해 식사의 평등화가 이루어짐으로써 필요 최저량의 영양 수준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는 집단에서는 장수자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눔의 음식문화를 소중히 하는 서귀포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장수하는 자가 많다고 알려졌다.
5. 음식의 패러다임 변화
서귀포 음식은 최근 웰빙 바람을 타고 ‘시골 음식’에서 서귀포의 정체성이 살아 있는 ‘민족 음식’[ethnic food]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 서귀포 밥상은 현대인에게서 문제가 되는 3고[고열량·고지방·고식염]과 3저[저섬유질·저필수미량영양소·저생리활성물질)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웰빙 식단이다.
이제 서귀포 음식은 부끄러운 음식에서 드러내 놓고 싶은 음식으로, 촌스런 ‘생된장 음식’에서 구수한 ‘고향의 맛깔’ 음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서 부자들이 먹는 음식으로, 저가 음식점에서나 사 먹는 음식에서 고가 음식점에서 판매되는 음식으로, 관광객이 꺼리는 음식에서 관광객이 찾는 음식으로, 육체노동자에 부적합한 음식에서 현대 정신노동자에 적합한 음식으로, 화려하지 않은 음식에서 쓰레기 발생이 적은 자연 생태적인 음식으로, 불결한 섬 음식에서 물과 공기가 깨끗한 청정 섬 음식으로, 구황 음식에서 성인병 예방을 위한 음식으로, 배고픈 저급 음식에서 다이어트 고급 음식으로, 동물성이 부족한 영양 결핍성 음식에서 채식 중심의 건강 장수 음식으로 그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