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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회 인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97
한자 任憲晦印章
이칭/별칭 전재(全齋),명로(明老),희양재(希陽齋),고산거사(鼓山居士),고산(鼓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연수원길 103[금흥동 110-2]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조선 후기 - 임헌회 인장 제작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연표보기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0호
현 소장처 임헌회 인장 - 충청남도 공주시 연수원길 103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성격 인장
재질 벽옥|목재
크기(높이,길이,너비) 3.8×4.1×3.3㎝[「전재」]|3.1×3.1×5.1㎝[「고산거사」]|3.8×4.5×3.4㎝[「임헌회장」]|3.0×2.9×2.8㎝[「명로」]
소유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관리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0호

[정의]

조선 후기 연기 지역에 거주한 임헌회와 그 후손의 인장.

[개설]

임헌회(任憲晦)[1811~1876]는 19세기 말 성리학자이다. 충청남도 연기·공주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성리학, 특히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인물이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경의당(敬義堂) 김진수(金振遂) 등이 있다.

임헌회의 문집교지와 함께 인장이 보존되어 있다.

[가계와 활동]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본관은 풍천이다.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된 임천모(任天模)이고, 어머니는 홍익화(洪益和)의 딸 남양홍씨이다.

1811년(순조 11) 천안시 직산면 산음리에서 출생하여 1836년(헌종 2) 감시(監試) 초시에 합격하였다. 송치규(宋穉圭)를 찾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842년(헌종 8) 홍직필(洪直弼)의 제자가 되었다. 1858년(철종 9)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효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판부사 김좌근(金左根)의 천거로 활인서별제·전라도도사·군자감정 등에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원정 등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만동묘(萬東廟)를 폐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부당함을 거듭 상소하여 다시 제향(祭享)[제사]하도록 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1년(고종 13) 연기 남면 양화리로 옮겨왔고, 1873년(고종 15)에는 공주 명강동[월송리]로 옮겨와 살았다.

1874년(고종 16)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관직에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그 뒤 사헌부대사헌·성균관좨주 등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연기·공주 일대에서 여러 문중의 신도비문과 정려기 등을 지었다.

1877년 성전(星田)[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 현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도담동 일대]에서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0여 년 뒤인 1885년(고종 22)에 후학들이 전재 임헌회를 제향하는 사우로 숭덕사(崇德祠)를 창건하였으며, 1902년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정2품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특징]

전재 임헌회의 인장을 비롯하여 아들 임만교(任萬敎)·임진재(任震宰)·임감재(任坎宰)·임간재(任艮宰) 등의 성명·자·호 등이 새겨진 인장, 간찰의 봉함인 등 총 41점이다. 재질은 벽옥(碧玉)과 목재(木材)이다.

이중 임헌회와 관련된 대표적인 인장의 크기는 「전재(全齋)」 3.8×4.1×3.3㎝, 「고산거사(鼓山居士)」 3.1×3.1×5.1㎝, 「임헌회장(任憲晦章)」 3.8×4.5×3.4㎝, 「명로(明老)」 3.0×2.9×2.8㎝이다.

이들 유물은 현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충청남도 공주시 연수원길 103]에 소장되어 있다.

[관련 유적과 유물]

문집으로는 『전재집(全齋集)』, 『고산집(鼓山集)』, 『속고산집(續鼓山集)』이 있다. 또 임헌회가 문인들에게 명하여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송시열의 문집에서 명언들을 뽑아 책으로 엮게 한 『오현수언(五賢粹言)』이 1905년에 간행되었다.

임헌회와 관련된 유물로는 풍천임씨 선대 유묵과 기록물이 전하여진다.

임헌회는 부친의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모은 『선고수필(先考手筆)』, 모친 남양홍씨가 자신에게 쓴 한글편지와 한글유언을 엮은 『선비수필(先妣手筆)』 및 『선비유언(先妣遺言)』, 선대의 간찰(簡札)[편지]을 엮어 만든 『서하세필(西河洗筆)』과 선대의 친필을 엮은 임태춘(任泰春)의 『지평공수필(持平公手筆)』 및 『지평공정려시첩(持平公旌閭詩帖)』, 임징하(任徵夏)의 『서재유묵(西齋遺墨)』과 『우제홍공수필(愚齋洪公手筆)』 및 『우암선생필(尤庵先生筆)』, 선대의 교지를 묶은 『선세관교(先世官敎)』 등을 남겼다.

추숭 유적으로는 1978년 전국의 유림 1,000여 명이 임헌회의 유허지인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성전지구 내덕동에 숭덕사를 복원하여 임헌회 외 전우(田愚)·이재구(李載九)·김준영(金駿榮)·이유흥(李裕興)·조흥순(趙弘淳)·임헌찬(任憲瓚) 등 문인 6명을 추가 배향하고, 매년 음력 3월 8일 향사하고 있다.

1990년에는 서원을 세우고 임헌회의 유허지명을 취하여 덕성서원(德星書院)이라 하였고, 2014년에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재 임헌회의 유품과 유물로 의미 및 가치가 있으며, 다양한 인장의 형태 및 용도·특징들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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