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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52
한자 李恒福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장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6년연표보기 - 이항복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18년연표보기 - 이항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59년 - 이항복 제향한 서원에 화산 서원이라는 사액 내려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46년 - 승지 이종적을 보내 영당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
추모 시기/일시 1832년 - 이항복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38년 - 우의정 이지연의 요청으로 봉사손 관리 등용 결정
출생지 이항복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묘소|단소 이항복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신도비 이항복 신도비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사당|배향지 화산 서원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사당|배향지 노덕 서원(老德書院) - 함경남도 북청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개설]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白沙)보다는 ‘오성 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동강(東岡).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방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성무(李成茂)이며, 할아버지는 이예신(李禮臣)이다.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며, 어머니는 결성 현감 최윤(崔崙)의 딸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부인은 권율(權慄)의 딸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활동 사항]

이항복은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하였다.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1575년(선조 8)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이이(李珥)가 천거하여 이덕형 등과 함께 한림에 들어갔으며, 1583년(선조 16) 사가독서 하였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 봉교, 성균관 전적,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예조 정랑 때 발생한 역모 사건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대사간 이발(李潑)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다. 그 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선조 23) 호조 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정철(鄭澈)에 대한 논죄가 있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해 정철 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하였지만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 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 판서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 제학,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였고, 바닷길로 윤승훈(尹承勳)을 호남 지방에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조사 차 황응양(黃應暘)을 보냈다. 이에 이항복이 일본이 보내 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서 마침내 구원병이 파견되었다.

당시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사유(史儒)의 3,000여 병력이 왔으나 패전하자, 다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대병력으로 구원해 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 도성을 탈환하여 환도하였다. 다음 해 선조가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分朝)를 설치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 보게 하였을 때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보필하였다.

1594년(선조 27)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가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해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하였다.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여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1598년(선조 31)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楊鎬)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 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자신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고 자진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 방해책(安民防海策) 16조를 지어 올렸다.

1600년(선조 33) 영의정 겸 춘추관 영사, 세자사(世子師) 등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 1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1602년(선조 35)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고 한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 사임하였다.

1608년(선조 41)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항복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하였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반대한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하였다가 도리어 구금되어 권당(捲堂)하는 사태가 생기자, 광해군을 설득하여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의 멸문과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을 자행하자 이항복이 이를 맹렬하게 성토하여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 인재 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망우리에 별장 동강 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 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기게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인목 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는데,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광해군 10)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정구가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면서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1622년(광해군 14) 간행된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 충렬 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분은 쌍분(雙墳)으로 부인 안동 권씨와 합장묘이다. 쌍분 중앙을 중심으로 전면에는 묘비와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그 앞 좌우에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그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는데, 1659년(효종 10) 화산 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 승지 이종적(李宗迪)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키는 은전이 있었다. 1832년(순조 32)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리 등용이 결정되었다.

이항복 선생 묘 앞쪽 비탈 아래 약 20m즘 되는 곳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影堂)이 있고 영당 우측 약 30m 지점에 1652년(효종 3)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김집(金集)이 썼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북청의 노덕 서원(老德書院)에도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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