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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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명우 |
출생 시기/일시 | 1531년 - 유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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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89년 - 유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89년 - 유전 평난공신 2등 책록, 시령 부원군에 책봉 |
출생지 | 유전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 |
묘소|단소 | 유전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
신도비 | 유전 신도비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문화(文化)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극후(克厚), 호는 우복당(愚伏堂). 아버지는 현감을 지내고 효우 정려 비를 받은 유예선(柳禮善)이며, 선조 때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외숙이다. 부인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활동 사항]
유전(柳㙉)[1531~1589]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 왕방산 밑에서 출생하여 남쪽 20리 소흘산 자락에서 생활하였다. 1552년(중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과 1556년(명종 11) 두 차례 과거에 급제하였다. 대제학 홍섬(洪暹)이 독서당의 인원을 선발할 때 학식과 문장에 뛰어나 박순(朴淳)·정윤희(丁胤禧)·최옹(崔顒)과 함께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받았다. 벼슬은 홍문관 정자·홍문관 저작·홍문관 박사·홍문관 수찬을 거치고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1559년(명종 14) 임금이 유전을 비롯한 이양(李樑)·정윤희·박순에게 족자에 그려진 그림을 주제로 시를 지어 올리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시에 뛰어났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승려 보우(普雨)와 외척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여 유배 보내는 데 앞장섰다. 1566년(명종 21)에는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이때 실록의 사론을 보면 “(유전은) 남을 극해(剋害)하려는 마음이 없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573년(선조 6) 동부승지, 1575년(선조 8) 도승지, 1576년(선조 9) 병조 참판, 1577년(선조 10) 대사헌, 1579년(선조 12)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580년(선조 13)에는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주위에서는 벼슬이 좌천되었다고 위로하였으나, 그는 “나라의 신하가 되어 진실로 유익하다면 군수·현감도 사양하지 말아야 하는데 무슨 말인가.” 하며 오히려 나무랐다고 한다. 1574년(선조 7) 동부승지로 재직할 때 학문을 논할 만한 인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추천하였으며, 1581년(선조 14)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자신의 행차를 침범한 신익(申翌)을 임금에게 추천해 선전관으로 삼게 하였다.
1583년(선조 16)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1585년(선조 18) 우의정에 올랐다. 1588년(선조 21) 사은사가 되어 부사 최황(崔滉), 서장관 황우한(黃佑漢)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유전이 친히 국문을 하는 임금을 옆에서 모시느라 밤낮으로 금문(禁門)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난을 수습하느라 고생한 탓으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해 10월 28일 “하늘이 도와 역적을 제거하고, 종사(宗社)를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선조가 “대신이 죽으니 놀람과 슬픔을 이길 수 없다. 역적을 국문하며 국사(國事)를 위해 애쓴 바가 많았는데, 이제 그를 잃음으로써 나의 팔다리를 잃었으니 아픈 마음 이길 수 없구나!” 하며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유전은 1575년 사림(士林)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겪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군부대 안에 있는데, 부인 안동 김씨와 합장 형태이다.
[상훈과 추모]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시령 부원군(始寧府院君)에 봉해졌을 뿐 아니라 불천지위(不遷之位)[국가에 큰 공이 있어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함]의 은전이 내려졌다. 위패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에 거주하는 후손 유창현의 사택에 안치되어 있다. 유전의 시장(諡狀)은 예조판서 김이익(金履翼)이 정리하였다.
한편 2010년 4월 29일 포천 종합 실내 체육관에서 ‘우복당 유전 선생 추모’를 시제로 한 전국 한시 백일장이 개최되었다. 포천 문화원이 주최한 제24회 반월 문화제의 일환으로 열린 이 행사에는 전국의 유림 및 한학자 250여 명이 참가하여 경연을 벌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신도비가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군부대 정문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