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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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茂朱赤裳山城 |
영어공식명칭 | Muju Jeoksang 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적상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330[북창리 산119-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박대길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5년 7월 10일 - 무주 적상산성 사적 제146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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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무주 적상산성 사적 재지정 |
현 소재지 | 무주 적상산성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330[북창리 산119-1] |
성격 | 산성 |
양식 | 석성 |
관련 인물 | 최영|최윤덕 |
크기(높이,길이,둘레) | 8,143m[전체 길이] |
면적 | 214,975㎡ |
소유자 | 국유|안국사 |
관리자 | 무주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에 있는 백제 시대 산성.
[개설]
무주 적상산성(茂朱赤裳山城)의 중요성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방어 시설인 산성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부각되었다. 전라도 동부 내륙 지역의 주요 방어 시설로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광해군(光海君) 당시 후금(後金)이 강성해짐에 따라 국방 시설의 점검과 정비,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보존 문제가 논의되면서 산성의 정비가 본격화되었다. 즉, 묘향산(妙香山)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더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물색되었는데, 적지로 무주 적상산성이 지목된 것이다.
이에 따라 1614년(광해군 6)에 무주 적상산성 안에 실록각이 창건되었고, 1618년(광해군 10)에는 새로 편찬된 『선조실록(宣祖實錄)』이 처음으로 봉안되었다. 이와 함께 산성의 방어를 위한 조치 등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1632년(인조 10)에 작성된 『무주현 적상산성 조진 성책(茂朱縣赤裳山城條陳成冊)』[진성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주 현감 김수창(金壽昌)이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무주현 적상산성 조진 성책』에는 산성의 규모와 4대문 현황, 가사형지(家舍形止), 수성 제도(守城制度), 군량(軍糧)과 군기(軍器)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후 1634년(인조 12)에는 묘향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이 이안(移安)되었다. 그런데 1636년(인조 14)에 발발한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해 사고를 비롯한 산성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었다. 3년 후인 1639년(인조 17)에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주를 비롯한 인근 7읍을 적상산성에 영속시켜 산성을 수축할 것과 각성 대사(覺性大師)를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성중에 상주시킬 것을 계청하였고, 임금이 이에 따랐다. 1641년(인조 19)에는 사각 옆에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였고,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함으로써 명실공히 선사 양각(璿史兩閣)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645년(인조 23)에 승병들의 숙소 문제로 호국사(護國寺)가 창건되었다. 1674년(현종 15)에 무주현(茂朱縣)이 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되면서 현감이 도호부사 겸 수성장(都護府使兼守城將)으로 위상이 높아졌으며, 1703년(숙종 29)에는 토포사(討捕使)까지 겸임하게 되어 실질적인 독진관(獨鎭管)이 되었다.
[건립 경위]
무주 적상산성의 축성 시기에 관해서는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로 정리되어 왔다. 그것은 고려 말 장군 최영(崔塋)의 축성 건의와 조선 초기 성곽 정비에 따라 체찰사(體察使) 최윤덕(崔潤德)이 반드시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하는 등 주요 국방 시설로 거론된 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옛 문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 중엽 거란의 제2차 침입[1010년] 이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시대적 정황과 축성 방식 등을 볼 때 읍성(邑城)이 허술하였던 백제 시대 주계현(朱溪縣)의 방어 시설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멸망 후 통일 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방치되었으나, 고려 중기 이후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따라 인근의 여러 고을 백성이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1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무주군 적상면의 중심부로서 북창리와 포내리, 괴목리, 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 있는 적상산(赤裳山) 정상부에 자리한다. 적상호에서 산성로를 따라 800m 가다가 우측의 안국사(安國寺) 방면 산성로를 따라 900m 이동하면 무주 적상산성이 나온다.
[형태]
적상산의 정상부에 형성된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을 이용해서 석성(石城)을 쌓은 대표적인 방어 산성이다. 전장은 8,143m, 면적은 21만 4976㎡이다.
[현황]
무주 적상산성 안에는 안국사가 이건(移建)되어 있고, 적상산 사고가 복원되었으며, 인근에 무주 양수 발전소 상부 댐과 전망대 등이 있다. 1965년 7월 10일 사적 제14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무주 적상산성은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 지대에 축성되어 한때 방치되기도 하였으나, 고려 시대에는 국란이 있을 때마다 인근 백성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 조선 시대에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는 요지가 되었다. 1910년(순종 3) 국권 피탈 이후 사고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방치되었으나, 현재는 성벽 일부가 보존되었고 그 유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