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149 |
---|---|
한자 | 晋州城 |
영어음역 | Jinju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촉석성,거열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정의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진주성 사적 제118호 지정 |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진주성 사적 재지정 |
성격 | 석성 |
양식 | 평산성 |
건립시기/연도 | 고려시대/고려 후기|조선시대 |
관련인물 | 김중광|하륜|김수|이수일|남이흥 |
높이 | 5~8m |
둘레 | 4㎞ |
면적 | 173,036㎡[52,343평]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남성동 |
전화 | 055-749-2480[진주성관리과] |
팩스 | 055-749-2853[진주성관리과] |
홈페이지 | 참진주 진주성관리과(http://castle.jinju.go.kr)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성.
[개설]
진주성은 남강에 면한 단애상에 축조한 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삼대첩(壬亂三大捷)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 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명칭유래]
진주성은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백제 때는 거열성(居列城)이었다고 한다.
[건립경위]
진주가 한반도의 동남단인 경상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면서 삼국시대 이래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진주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진주가 원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진주에는 성이 축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리고 1379년(우왕 5)에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강주진장 배극렴이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때까지 토성이었던 촉석성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다른 기록에 의하면, 1607년에 김태허(金太虛)가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기록에 기초하여 지금의 진주성이 대략 이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남성동 일원에 있다. 진주시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남해고속국도와 통영~진주간 고속국도가 통과하고 있어 인근지역에서의 지리적 접근도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형태]
내성의 전체 넓이는 200㎡이며, 둘레는 약 600m이다. 외성의 둘레는 약 4㎞이다. 진주성내에는 진주 촉석루, 의기사, 쌍충사적비, 김시민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가 나란히 서 있는 정춘관, 진주성 북장대, 진주 영남포정사문루, 진주 창렬사, 호국사 등의 유적들이 있다. 2002년 5월 3일에는 진주성의 주관문이었던 공북문이 복원되었다. 공북문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토한 화강암석으로 외벽을 쌓고 1층 출입문은 20평으로, 2층 14평은 옛 전시 때 지휘소로 활용하던 것으로 복원되었다.
[현황]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고, 이후 정비·복원되어 진주 시민들의 휴게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진주성은 진주 시민들의 휴식 및 체육공간으로서 그리고 임진왜란의 역사가 살아 있는 관광지로서 손꼽히는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진주성은 진주 시민을 비롯하여 사천시, 마산시, 창원시 등 인근도시의 주민들이 휴일 등을 이용해 많이 찾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유적지로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방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