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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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輿圖鎭安縣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유호석 |
[정의]
19세기 초에 제작된 전국 군현 지도집 『광여도(廣輿圖)』 제3책 호남도(湖南圖) 중 일부인 진안현 부분.
[개설]
『광여도(廣輿圖)』는 회화식 전국 군현 지도집으로, 종래 전국과 도별의 수준에서 제작되던 지도가 18세기 이후 고을 단위로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광여도는 당시 회화식 군현 지도의 대표적인 지도인 『해동지도(海東地圖)』와 유사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각 고을뿐 아니라 「천하도」, 「중국도」, 「유구도」, 「일본도」 등의 세계 지도와 「요계관방도」 등의 관방 지도, 「조선 지도」, 「도성도」를 수록하고 있으며, 경기도, 호서도, 호남도, 영좌도, 영우도, 관서도, 해서도, 관동도, 관북도 등으로 나누어 각 군현도를 싣고 있다. 호남도에 실린 진안현의 지도 역시 다른 고을의 지도들과 마찬가지로 채색 회화 형식의 그림을 통하여 진안현의 경계와 산수 및 관아와 사찰 등을 표현하고 있어서 이곳의 지역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저자]
『광여도』 「진안현」 의 편자는 미상이다.
[편찬/간행 경위]
『광여도』의 편찬 시기는 충청도 지도인 「호서도」에 1800년에 고을명이 니산(尼山)에서 노성(魯城)으로 바뀐 사실이 기재된 점으로 미루어 19세기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영조대 중반부터 계속되던 관찬의 회화식 전국 군현 지도집 편찬 방식이 단절되고 영조대 말부터 기호식 지도집의 편찬이 대세를 형성해 가는 시점이다. 국가가 합리적인 윤곽을 가진 기호식 지도집을 편찬해 활용하게 되면서 과거의 회화식 관찬 군현 지도집이 정책 자료로서의 의미를 더 이상 가지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공적 통치력이 급속히 이완되는 19세기의 정치적 환경과 맞물리면서 회화식 군현 지도집이 민간에 유출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광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한 18세기 군현 지도집이 민간에 유출되면서 만들어진 지도집으로 판단된다.
진안현 지도에도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18세기의 진안 지역의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분수계의 지역적 특성이 도면에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도면과 별도로 쓰인 설명문에는 진안현의 사회·경제적 사정을 알려주는 항목들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형태/서지]
『광여도』는 총 381장에 달하는 천하 채색 지도로, 총 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책은 천하도·중국도·류구도·일본도·요계관방지도·조선 지도·도성도·경기도, 제2책은 호서도, 제3책은 호남도, 제4책은 관서도·해서도, 제5책은 영우도, 제6책은 영좌도, 제7책은 관동도와 관북도이다. 그 중 제3책 호남도에 진안현의 지도가 실려 있으며, 여기에는 진안현의 당시 사회 경제상을 보여주는 주기(註記)가 첨부되어 있다.
[구성/내용]
진안현의 지도는 동서남북으로 장수계(長水界), 전주계(全州界), 임실계(任實界), 용담계(龍潭界) 등으로 나누어 현의 경계를 산줄기와 물줄기의 조합을 통해 표시하고 있다. 고을 내 행정 구역으로는 탄전면, 상도면, 여면, 두미면, 북면, 마령면, 동면, 서면 등을 구분 없이 표시하고 있다. 이 밖에 천방산, 부귀산, 백운산, 마이산, 내동산, 중대산 등의 산과 대항치, 율치, 웅치, 마치 등의 고개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향교, 객사, 아(衙), 강무루, 성심정, 창, 외창 등의 건물과 인화사, 고림사, 김당사, 반룡사, 중대사 등을 표시하고 있다. 지도의 주기에는 5,557명의 민호(民戶) 수와 납미 군질(納米軍秩)·납 2필질(納 二疋秩)·납 1필질(納一疋秩)·각 항곡 물질(各 項穀 物秩), 잔답의 결수, 현의 동서남북 거리 등을 차례로 싣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광여도』에 보이는 진안현의 지도는 분수계 지역이라는 진안의 지역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하여 산, 고개, 절, 지형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의의와 평가]
진안 지역의 채색 지도를 통해 19세 초 진안 지역의 지리적 형태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음은 물론, 지도의 주기를 통해서는 당시 진안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