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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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新報 |
영어음역 | Jeju Sinbo |
영어의미역 | Jeju Newspaper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문교 |
성격 | 지역일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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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김석호|김재능|이종렬|김두진|강우준|김선희|김대성|강병희 |
창간인 | 김진수 |
발행인 | 김진수 |
판형 | 대판[375㎜×595㎜] |
창간연도/일시 | 1946년 1월 26일 |
종간연도/일시 | 1962년 11월 19일 |
총호수 | 5,301호[1962년 11월 19일 기준] |
발행처 | 제주신보사 |
발행처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소장처 | 제주일보사|국회도서관 |
소장처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동 2324-6번지[도령로 81]|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의사당대로 1] 국회의사당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발행되었던 지역 일간 신문.
[창간 경위]
1945년 『제주민보』 창간 후, 신문 용지조차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운영난에 허덕이게 되자 『제주민보』 창간인들은 『경성일보』 목포특파원으로 활동하다 귀향한 김진수(金鎭洙)를 경영 책임자로 영입하였다.
1946년 1월 26일 김진수는 신문 제작에 참여하여 회사 조직을 갖추고, 미군정 당국에 미군정 법령 제19호[1945.10.30 공포]에 따라 신문을 등록하여 발행인으로 취임하였다. 신문 제호는 『제주민보』에서 『제주신보』로 변경하여 등록하였다.
1946년 5월 29일 미군정 법령 제88호가 공포되어 「신문 및 기타 정기 간행물 발행」이 허가제로 변경되자 허가 번호 제262호로 신문 발행 허가를 받았다. 신문사 등록을 마친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사원인쇄소를 인수하여 회사 사무실과 겸용하였으며, 『합동통신』을 수신하기 시작하였다.
[형태]
판형은 대판[375㎜×595㎜]이며 격일간으로 4면을 발행하였다.
[변천]
1947년 1월 『제주신보』는 계속되는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을 주주로 영입하여 회사를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주주로 참여한 유지들은 황순하(黃舜河)·윤성종(尹性鍾)·백찬석(白燦錫)·홍종언(洪宗彦)·김석호(金錫祜)·박영훈(朴永勳)·신두방(申斗玤) 등이었고, 사장에 김석호를 선임하였다.
이때 회사 체제를 정비하고 사고(社告)를 통하여 신문 발행 주기를 격일간에서 일간으로 전환할 방침을 밝혔다.
주식회사로 개편한 후 제주 지역 내에 지국을 설치하는 한편 제주 지역 외에 보급망과 취재진을 구성하였다. 제주 지역 내에서는 제주읍·서귀면·애월면·대정면·안덕면·한림면과 외도 지국과 신산 지국을 두었다. 제주 지역 외에서는 서울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전라남도 광주에는 전남총국을, 전라남도 목포에는 지국을 설치하였다.
회사 기구로는 편집국과 영업국을 두었고, 편집국에는 편집부·취재부·정경부·사회부·문화부·조사부를 신설하여 6부의 기구를 갖추었다. 설립 초기 경영을 담당한 임원으로는 김진수·김석호·백찬석 등이 있었다.
1947년 5월 처음으로 월정 구독료를 50원으로 정하여 유가지로 전환하고, 이듬해 2월에는 구독료를 100원으로 인상하였다.
1948년 4월 4·3사건이 일어나 사회 혼란이 계속되자 20여 일 동안 휴간하였다. 1948년 8월 제2대 편집국장 김호진(金昊辰)이 좌익 무장대 담화문을 인쇄한 혐의로 군부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1948년 10월 제주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4·3사건 진압 명분으로 파견된 서북청년단(단장 김재능(金在能))이 『제주신보』를 접수하여 10개월 간 발행하였다. 1949년 10월 계엄령이 해제되고 신문사 경영권이 회복되자 김석호가 다시 경영을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피난민들이 제주 지역으로 건너왔다. 피난민 가운데는 문인과 언론인도 있었다. 그들 중 『제주신보』 제작에 참여했던 언론인으로 곽복산·이완희·오재동 등 10여 명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다. 4·19 이후 언론 자유가 보장되자 언론 매체들이 난립하였다. 1960년 5월 4·3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제주 지역민들로부터 양민 학살 진상 규명 신고서 1,259매를 접수하여 국회 4·3사건 진상 조사단에 전달하였다.
1962년 군사 정부의 언론 정책에 따라 제주 지역에서 발행되던 『제주신보』와 『제민일보』는 『제주신문』으로 통합되었다. 『제주신보』와 『제민일보』 두 신문사는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 조건을 정하였다. 통합 신문의 제호는 『제주신문』으로 하고, 지령은 역사가 오랜 『제주신보』의 지령을 계승하였다. 통합 창간일은 1962년 11월 20일로 정하였다.
주식 구성은 『제주신보』 45%, 『제민일보』 40%로 하고 나머지 15%는 관계 당국이 특별 관리하기로 하였다. 경영진은 『제주신보』에서 사장과 주필, 『제민일보』에서 전무와 편집국장을 인선하였다. 기자는 9명을 정원으로 하여 『제주신보』에서 5명, 『제민일보』에서 4명을 선발했는데, 현역 기자들을 대상으로 재시험을 거쳐 선발하였다.
임원은 양사가 합의한 대로 『제주신보』에서 사장 강우준(康祐俊), 주필 김용수(金瑢洙)를 선임하고, 『제민일보』에서는 전무 김선희(金瑄熙), 편집국장 고정일(高正一)을 선임하여 경영진을 구성하였다. 사옥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1동 『제민일보』사옥을 사용하였다. 통합 일간지인 『제주신문』은 1962년 11월 20일 지령 제5,302호 발행으로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주신보』는 4·3사건 당시 발행되던 제주 지역 유일의 신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