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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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鐵道-道路交通-中心地-位置-堤川市中央洞市場- |
영어의미역 | The Market and People of Jungang-dong in Jecheon-si, Located at the Center of the Railroad and Road Traffic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정화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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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9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대 후반 |
마을 | 중앙동충청북도 제천시 중앙동|교동충청북도 제천시 교동 |
하천 | 용두천 충청북도 제천시 청전동 |
다리 | 학다리 충청북도 제천시 교동 |
시장 | 중앙시장 충청북도 제천시 중앙동|내토재래시장 충청북도 제천시 중앙동|동문시장 충청북도 제천시 중앙동|고추시장 충청북도 제천시 중앙동 |
[개설]
제천 시내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중앙동. 사람들이 깨어 날 시간 중앙동의 여기저기에서 문이 열린다. 하루를 시작하는 중앙동 사람들의 분주함이 이곳 중앙동 시장에 숨을 불어 넣는다. 제천이 1980년 시(市)로 승격되기 이전부터 중앙동은 제천의 중심가였고, 지금도 여전하다. 더군다나 중앙동과 가까운 곳에 제천역과 제천고속버스터미널이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기 쉽고, 같은 이유로 이곳에서 사방 어디로든 나가기가 좋다.
기차를 타고 제천역에 내렸다면 중앙동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곳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제천역에서 중앙동을 찾아가려면 영천동과 명동을 거쳐야 한다. 역전교차로에서 제천고속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가면 명동교차로가 나온다. 명동교차로를 거쳐 일직선으로 계속 가면 중앙동이 나온다. 중앙동 쪽에서 조금 더 가면 제천고속버스터미널과 제천시외버스터미널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중앙동은 제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태백상권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여전히 인근의 단양, 영월, 평창, 정선 등지에서 기차나 차를 이용하여 제천 중앙동으로 장을 보러 온다. 특히 제천역은 중앙선, 태백선, 충북선의 철도가 지나고 있어 제천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기차를 이용하여 제천으로 왕래하기가 편리하다.
[철도 교통과 도로 교통의 중심지 제천]
지금 제천은 교통의 요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곳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제천이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훨씬 교통이 나쁜 곳이었다. 조선 전기 문신이면서 충주의 전통 인물인 이승소(李承召)[1422~1484]가 시로 읊었던 대로 제천 지역은 “톱니처럼 뾰족뾰족한 돌에 말도 발굽을 삐기 쉬운 좁은 길이 비탈을 따라 실낱같이” 통했을 뿐이었다. 오늘날 제천에 활기를 불어 넣은 중앙선 철도가 위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시에, 아래쪽으로는 단양군에 각각 하나씩 설치된 루프식 터널이 제천 지역과 연결되어 있음은 그런 사정을 잘 설명해 준다.
제천시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의 ‘겨드랑이’쯤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겨드랑이는 비탈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지대에 속한다. 한강을 따라 우리나라 중부 지역의 단면을 살펴보면, 높이가 1,200m에서 1,400m에 이르는 태백산 지구, 600m에서 700m에 이르는 대관령 지구, 500m에서 600m에 이르는 평창 하진부 지구, 300m에서 400m에 이르는 제천 지구, 100m에서 200m에 이르는 충주 지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천 지구는 “지세가 가장 높은 곳”이라고 했던 조선 전기 정인지(鄭麟趾)[1396~1478]가 한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충주 지구보다 평균 높이가 100m나 높다.
지대가 높은 곳이지만 침식이 쉽게 되는 화강암으로 땅바닥이 이루어져 있어 제천시는 남쪽의 청풍면을 중심으로 해서 이른바 고원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제천분지라고 불리는 표주박 모양의 이 고원 분지는 남한강이 표주박의 잘록한 허리 부분을 지나감으로써 완전히 다른 모습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북쪽과 남쪽은 서로 찻길도 거의 막혀 있어 생활권도 달리하고 있다.
제천 분지 북부의 중심지인 제천시는 앞서 말한 대로 북쪽에 차령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나 중앙선 철길이 북쪽으로 주포천을 따라 달려 올라가서 루프식 터널을 지나 험준한 치악산을 극복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단양군과 죽령을 또 루프식 터널로 극복해서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이른다. 그리고 충북선이 이웃의 봉양읍에서 갈라져 나가 마침내 경부선과 이어지고, 태백선이 영월 토교천을 따라 태백산 언저리의 광산 지대를 지나 동해안의 산업 기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서 제천시는 강원도의 가까운 지역들인 영월군, 정선군, 평창군까지 제천 생활권으로 끌어들였다.
태백산을 낀 강원도의 여러 지역들과 통로가 되어 주는 태백선은 제천시와 강원도 정선군 증산 사이에 건설된 산업선이다. 처음에는 함백선이라고 불렸던 이 철길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에 착공되어 1957년 3월에 완공되었다. 이 철도가 영월, 함백, 정선 같은 고장에서 캐내는 무연탄과 태백산맥 일대의 임산물을 실어 나를 뿐만 아니라, 태백선을 이용하여 제천과 단양에 자리 잡은 시멘트 공장에서 생산한 시멘트를 실어 나르기도 한다.
이렇듯 태백선이 열리면서 제천 지역에서 강원도 정선군 증산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그전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두 곳을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제천역 인근 봉양역과의 사이에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조차장(操車場)이 있다. 조차장은 기차의 객차(客車)나 화차(貨車)를 분리하고 그 연결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제천역 조차장에서는 화차를 분리하고 연결해주며 태백선 화물을 충북선과 중앙선 열차에 연결해 줄 뿐 아니라, 제천에서 기차를 타면 중앙선, 태백선, 충북선을 따라 강원도와 충청북도, 경상북도까지 닿을 수 있다.
1995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제천시는 충청북도 북부 지역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중앙고속도로 이외에도 원주와 단양 간 국도 5호선, 충주와 단양 간 국도 36호선, 충주와 영월 간 국도 38호선이 교차하면서 자동차 교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도의 교차 선상에 있던 제천시는 자동차를 이용하여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으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었다. 이렇게 제천시의 철도와 도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의 이점은 중앙시장이 태백상권으로서 그 역할을 유지하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제천장의 명맥을 이은 중앙시장의 과거]
제천역에서 명동로터리를 돌아 교동 쪽 방향으로 보면 중앙시장 상가 건물이 보인다. 중앙시장은 제천 시내의 가장 중심지인 중앙로에 자리 잡고 있는 시장이다. 중앙동은 1980년 시 승격 이전에는 제천읍이었다. 제천 토박이로 중앙의림명동주민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권기은에 의하면, 1980년 제천읍 시절 당시 제천장이 열렸던 곳은 지금의 동명초등학교 옆이었다고 한다. 그곳을 사람들은 ‘읍부리시장’이라고도 불렀다. 동명초등학교 옆을 중심으로 교동 인근의 학다리와 용두천(龍頭川)을 따라 자리하고 있던 제천장에는 인근 평창이나 정선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모여 들어 거래가 이루어졌다.
1953년 제천장은 중앙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등록 시장 개설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과거 제천장이 상설 시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중앙시장으로 상설 시장화 되기 이전 제천 시내에는 2일과 7일자에 제천장이 열렸다. 제천장은 이 시기 사통팔달로 뻗은 철로를 따라 강원도에서 나는 산물이 모여들었다.
과거 제천장이 열렸던 당시, 장꾼들은 장차를 타고 장사를 다녔다. 장차는 ‘제무시’라고 부르는 차로, ‘GMC CCKW 353’의 2.5톤 트럭을 일컫는 말이다. 정식 명칭은 ‘제너럴 모터스의 지엠씨’지만 사람들은 일본식 발음으로 ‘제무시’라고 불렀다. 제무시는 강원도의 자갈길을 다니기에 적합한 차였다. 장꾼들은 제무시를 타고 장을 보러 강원도로 많이 다녔다. 장차를 이용하여 장을 찾아다니며 장사하던 사람들은 주로 점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노점 장사꾼이 대부분이었다.
장차를 타고 장사를 다니던 사람들은 제천장 인근에 있는 연탄공장 공터에 모였다. 중앙시장 상가번영회 임병오 회장의 기억에 의하면 용두천을 복개하기 전 중앙시장 근처에는 연탄공장이 있었고, 그 옆에 조그만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가 장차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장차는 여러 명의 장사꾼이 물건을 싣고 다녔다. 주로 고추, 곡물, 식료품, 옷 등이 장차를 이용한 장사 품목이었다. 장차로 장사 가는 것을 ‘외장 뛰기’ 혹은 ‘외장 간다’라고 한다. 장날이 되면 장차로 제천 인근의 장들을 날짜에 맞춰 돌아다녔는데, 가까이는 청풍면과 수산면, 덕산면까지 갔고, 멀리는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와 평창군 대화면, 정선군까지 갔다.
장차는 인근 청풍이 수몰되기 이전에는 청풍장에도 갔다. 청풍의 무와 배추는 옛날부터 유명했다. 청풍장에서 도매로 구입한 무와 배추는 제천으로 들어와 주로 동문시장의 새벽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용두천 복개 공사를 계기로 자리를 옮긴 중앙시장]
1987년 용두천의 복개 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중앙시장은 용두천을 따라 하천 변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용두천변을 따라 장사꾼들이 모여들면서 점포를 짓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점포 없이 노점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용두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면서 지금의 중앙시장 상가 건물이 착공에 들어갔다. 이미 복개 공사를 계기로 시장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던 중앙시장 점포들은 현재의 내토시장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옮겨 갔다. 당시 내토시장이 자리한 곳은 오두막집이 몇 채 있는 공터에 불과하였다.
1989년 중앙시장 상가 건물이 완성되고 내토시장 자리에 있던 중앙시장 점포들은 중앙시장 상가 건물로 입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중앙시장 상가 건물로 들어가지 않고 남아 있던 점포들은 지금의 내토시장을 형성한 동력이 되었다.
[제천 상권의 중심은 물론 태백상권의 중심, 중앙시장]
중앙시장 상가 건물은 지상 3층 건물로 명동로터리를 돌면 바로 그 위용을 드러낸다.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띈다. 5년 전에는 제천시에서 중앙시장 상가 건물 가까운 곳에 제천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였다.
중앙시장 건물은 현재 1층에는 주단과 포목을 중심으로 상점들이 입점하여 있다. 1층에 입점한 점포주들은 대개 과거 용두천에서 장사를 하던 중앙시장의 터줏대감들이 대부분이다. 상가 2층은 잡화류를 중심으로 침구, 커텐, 수입 그릇 등을 판매하고 있다. 상가 건물에는 1, 2층 모두 합쳐 약 930여 개의 점포가 입점한 상태이다.
중앙시장이 개설되기 이전 1950년대에는 인근 제천 우시장으로 인하여 서부동의 서부시장이 명성이 높았다. 서부시장은 당시 우시장의 영향을 받아 상권이 컸다. 하지만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시장의 규모가 축소되자 덩달아 서부시장 상권이 축소되더니 결국 상권이 중앙시장으로 옮겨 왔다. 그러니까 중앙시장은 196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된 셈이다.
과거 중앙시장에는 도매상들이 많았다. 제천의 도매상들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싼 값에 물건을 매입하여 왔고, 주변 지역의 소상인들이 충북선, 중앙선, 태백선 등을 타고 제천으로 와서 물건을 사가지고 갔다. 기차를 타고 대구나 멀리 부산에 사는 소상인들까지 물건을 사러 제천으로 왔던 것이다. 제천에서 물건을 구입한 소상인들은 주로 기차의 화물칸을 이용하여 물건을 현지로 가져갔다.
제천 시내에 대형 마트들이 입점하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중앙시장 상권은 조금씩 축소되었다. 상권 활성화를 위해 2010년에는 상가번영회 회원들이 제천 음악제를 유치하는 등 제천 시민과 함께 하는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펼치고 있다.
[중앙시장과 함께한 인생의 희로애락]
중앙시장 상가 건물에서 보림주단을 운영하고 있는 장인기와 이금순은 중앙시장의 터줏대감이다. 장인기는 중앙시장 상가번영회 초대 회장도 맡았다. 과거 중앙시장이 복개되기 전부터 장사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앙시장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장인기와 이금순 모두 강원도 영월군 남면이 고향이다. 두 사람은 중매로 만나 장인기가 고등학교 3학년 다니던 열아홉 때, 이금순이 고등학교 1학년이던 열일곱 살 때 결혼했다. 장인기의 경우 영월에서 제천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제천으로 학교를 다닐 때 60리를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장차인 제무시를 얻어 타고 학교를 다녔다고 회상하였다.
결혼을 하고 장인기는 춘천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이금순은 영월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따로 생활했다. 몇 년 후 장인기는 ‘포항해무청’, 현 포항지방해양항만청으로 직장을 옮겼다. 포항으로 이사를 가면서 영월에 있던 이금순도 함께 갔다. 포항에서 장인기가 직장 생활을 하던 때 첫째와 둘째를 낳았다.
장인기는 가끔 바다로 순찰 업무를 다니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하는 일이 위험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후 시댁과 친정에서 자본금을 대주어 제천으로 옮겨와 중앙시장 내에서 기성복 도매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금순은 장사 수완이 없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기성복 도매 장사는 잘되었다. 기성복 장사를 하면서 차례로 셋째, 넷째, 막내를 낳았다.
기성복 장사를 한 20년 동안은 장사가 잘되어 수익을 많이 올렸다. 그때쯤 지금의 포목점으로 업종을 전환하였다. 포목점으로 전환하면서 이불과 한복을 판매했는데, 당시 주로 한복이 많이 판매되었다.
장인기는 중앙시장이 복개되기 전이 수익이 더 좋았다고 회상했다. 장사가 잘되니 상인들은 항상 즐겁게 장사를 했고, 저녁 때 삼삼오오 모여 국밥집에 모여 술 한 잔 즐기는 일도 잦았다. 당시 시장 내에는 친목계가 많았다. 나이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동갑계도 있었고, 같은 업종끼리 모이는 계도 있었다. 포목점의 경우 한얼회를 조직하였다. 이외에도 샘벌회 등의 크고 작은 계모임이 있었다. 그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되던 시절이었다.
[중앙시장 이외에도 제천에는 시장이 많이 있었지]
중앙시장 외에도 중앙동 인근에는 역전시장, 서부시장, 우시장 등이 있었다. 역전시장은 상가 건물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제천역과 사이에 난 큰 길에서 난장 형태의 5일장이 3일, 8일에 열린다. 민속품을 경매하는 모습이나 과거 재래시장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어 ‘풍물시장’이라고도 한다. 또한 3일과 8일 하루만 열렸다가 닫는 시장이라는 의미에서 ‘번개시장’이라고도 부른다.
서부시장은 예전에 명동로터리 근처 제천여자중학교 가는 길목에서 제천중학교 정문 쪽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상권이 축소되어 먹을거리만을 판매하고 있다. 과거 중앙시장의 상권이 미미하던 때에는 서부시장으로 장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서부동에는 서부시장 외에도 우시장이 제천장과 같은 날에 열렸다. 우시장은 현재 청전동 성환아파트 자리에서 열렸는데, 박만서의 기억에 의하면, 그가 처음 제천으로 올라온 1957년 당시 제천의 우시장은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제천 우시장의 전성기 때에는 단양, 평창, 정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인근 서부시장의 경우 소시장이 열리면 덩달아 노점이 형성되어 더욱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현대형 전통 시장으로 부상한 내토시장]
내토시장은 중앙시장 상가 건물 맞은편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다. 시장 초입부터 시장바구니를 들고 시장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전통 재래시장의 모습이 느껴진다.
내토시장은 과거 제천 지역을 ‘내토’라고 부른 것에 연유한 이름으로, 1980년대 초 중앙시장 주변 골목 상권이 형성되지 않던 곳에 시골 아주머니들의 보따리 장사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85년부터 상점이 입점되기 시작하여 상가가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중앙시장 상가 건물을 지을 때 용두천변에 위치하던 중앙시장 점포들이 과거 중앙극장 골목을 중심으로 옮겨 왔다. 1989년 중앙시장 상가 건물이 완성되면서 일부 상인들이 중앙시장 상가 건물로 옮겨 갈 때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상인들이 내토시장의 모태가 되었다. 그때부터 조그맣게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재 좁은 골목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먹을거리와 스낵 위주의 부엌 시장, 찬거리 시장으로 통칭되고 있다. 2007년 8월 6일 재래시장으로 등록하였다.
현재 상가번영회 60여 명의 회원들이 단합하여 지역 경제는 물론 재래시장 살리기를 위해 많은 자구책을 모색하여 이벤트와 경품 행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수확으로 작년에는 지식경제부에서 선정한 우수 전통 시장으로 선정되어 지식경제부 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앞으로 내토시장은 아케이드 공사 발주, 시민들과 함께하는 행사 기획을 통하여 대형 마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전통 시장의 경쟁력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자 되라고 가게 이름을 부자상회로 지었지]
내토시장 안의 부자상회는 부부가 장사를 하고 있다. 주인공은 김덕기와 장재훈이다. 장재훈의 경우 스물두 살 때부터 장사를 시작하여 49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 과거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중앙시장에서 시작했다. 중앙시장이 복개되기 전 용두천 변을 따라 상가가 형성되어 있을 때부터이다. 장재훈은 그때 점포 없이 노점으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김덕기는 맞은편에서 어물가게를 했다. 그렇게 18년간 서로 마주보며 노점 장사를 하였다.
장재훈은 처음부터 과일 장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에는 용두천변 근처에서 소머리국밥과 순대를 파는 식당을 3년 정도 했다. 식당을 하다가 과일 장사로 업종을 바꾼 것이다. 과일 장사를 18년 정도 하다가 그만두고, 김덕기와 포장마차를 몇 년 하기도 하였다. 그 후 사촌오빠를 통해 현재 내토시장의 부자상회 자리를 새로 매입하면서 점포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덕기의 경우, 장재훈이 중앙시장 안에서 노점으로 과일 장사를 하던 시절 장차를 타고 제천 인근의 시장들로 장을 다녔다. 그는 장차를 이용하여 다니던 시기를 30년 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주로 과일을 장차에 싣고 다녔다. 당시 기억에 점포 없이 노점을 하던 사람들이 주로 장차를 타고 장을 다녔다고 한다. 장차를 타고 장사 다니던 시절을 ‘외장 간다’ 또는 ‘물건 하러 다니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장차를 타고 가까운 청풍장은 물론 인근 영월의 주천장까지 다녔다. 대개 일주일 동안 두 개의 장을 다니며 장사를 했다.
외장을 가던 그 시절에는 파는 물건의 종류별로 장차를 맞춰서 다녔다. 과일이면 과일, 어물이면 어물, 이런 식으로 서로 모여 장차를 타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한 차에 혼자 타기도 했지만 대개 한 차에 여러 명이 모여 탔다. 장차 위에 짐을 싣고 짐 위에 사람들이 여러 명 탔다. 장차의 운전석 옆은 두 명밖에 타지 못해서 여러 명이 함께 가는 차일수록 짐 위에 타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잠깐 장차를 타고 과일 장사를 다니다가 김덕기는 어물 가게 노점을 내면서 외장을 다니지 않게 되었다.
[번개시장이 열리는 동문시장]
내토시장 끝에서 맞은편 큰길을 사이에 두고 동문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내토시장과 동문시장은 맞은편 큰길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을 뿐이지, 정겨운 재래시장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다.
동문시장은 서부시장과 중앙시장 다음으로 형성된 시장으로, 시장 일대를 ‘동문거리’라고 부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상권이 축소되었지만 과거에는 중앙시장과 견주어 비교될 만큼 제천 시내에서는 유명했다. 잡화 위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던 중앙시장과 달리 주로 생활필수품과 채소가 거래되었다.
현재 은진슈퍼 근처에서는 번개시장’이 열린다. 주로 새벽에 번개같이 열렸다가 닫힌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다. 새벽에 열리는 시장이라고 하여 ‘새벽시장’이라고도 한다. 번개시장에서는 채소와 과일이 도매로 많이 거래된다. 채소의 경우 무와 배추는 과거 청풍장에서 사오기도 했는데, 주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 사이에 많이 거래되며, 기차를 이용하여 영월이나 평창에서도 와서 사가기도 한다. 번개시장은 주로 여름철에 활발하게 열리며,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열리지 않는다.
[기차 타고, 자동차 타고 찾는 고추시장]
중앙고추시장은 중앙시장이 있는 상가 건물에서 나와 제천여자중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형성되어 있다. 중앙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고추시장’이라는 글이 크게 쓰여 있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그 건물을 중심으로 고추 거래가 이루어지는 조그만 점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중앙고추시장은 과거 중앙시장의 복개 공사가 이루어지기 전 중앙시장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복개 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서부동 인근으로 옮겼는데, 그 중 일부가 화산동 인근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제천 시내의 고추시장이 이원화되었다. 서부동 인근의 고추시장을 중앙고추시장이라고 부르며 화산동 인근의 고추시장을 제일고추시장이라고 불렀으나, 화산동에 위치했던 제일고추시장이 5년 전 신월동으로 옮겨 신월동 고추시장으로 편입되었다.
중앙고추시장의 고추는 주로 제천 시내 인근 송학면, 청풍면, 백운면, 수산면, 한수면 등지의 농가에서 생산되는 것들이다. 그 외 지역에서도 고추 농가를 정해 놓고 고정적으로 고추를 유입하는데, 인근 단양의 매포읍 매포리 외에도 멀리 영월의 주천, 정선에서도 가져온다. 강원도는 과거 대표적인 고추 산지였는데, 지금도 영월의 주천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다. 철도 교통이 좋아지면서 상인들이 기차를 이용하여 산지에서 직접 사가지고 오고, 역시 철도와 도로를 이용해 서울을 비롯해 호남과 영남 등지로 팔려 나간다. 요즘은 도로 사정이 좋아져서 자동차로 직접 구매하러 오는 사람도 많다.
과거 청풍장이 있었을 때는 청풍장과 백운장에서 나는 고추를 사 와서 팔았다. 장이 서는 날 직접 청풍장에 가서 사 와 제천장에서 유통하는 형태였다. 1970년대 태백의 광산업이 발달하고 단양과 제천 지역에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며 인구가 증가하자 고추시장 또한 활성화되었다.
고추시장이 1년 중 가장 바쁠 때는 역시 고추가 많이 수확되는 가을철이다. 특히 김장을 앞둔 10월부터 고추시장은 사람들도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붐빈다. 이때는 기차뿐만 아니라 자동차를 이용하여 인근 도시의 소매상인들이 모여든다. 고추시장이 활성화되었던 4~5년 전만 해도 점포가 40~50개나 되었으나 지금은 상권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20개 미만의 점포가 문을 열고 있다.
[고추 팔러 강원도로 장차 타고 장사 다녔지]
현재 중앙고추시장 상가번영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종용은 중앙시장이 복개되기 전 용두천변에서 점포를 가지고 고추 장사를 했다. 그렇게 시작한 고추장사가 40년이 넘었다. 박종용은 조치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장사를 하기 위해 제천 지역으로 왔다.
박종용도 장차를 타고 강원도 쪽으로 장사를 다녔다. 그는 그때를 처음 장사를 배우던 시절이라고 회상하였다. 처음 장사를 배웠던 30대 초반은 그렇게 장차를 타고 다니며 제천 인근의 장을 다녔다. 장차 앞에는 운전수를 비롯하여 두 명 정도 탔다. 운전수 옆에 타려면 일단 물건을 많이 실어야 하지만, 운전수와 친하게 지내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장차를 타는 사람들 사이에는 운전수와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려고 경쟁이 생기기도 했다. 그나마 짐칸에 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물건은 실어도 기차나 버스를 타고 따로 이동하기도 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경우 장차의 운전수와 정한 날짜의 장에서 만났다. 장차에 싣는 물건 값은 주로 보따리 하나로 계산했다.
그 당시에는 고추가 지금보다 적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장차로 고추 장사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처음 장사를 배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주로 강원도의 장들을 돌아다니며 고추 이외에도 강원도에서 나는 곡물을 구입하여 제천으로 가져와서 되팔았다. 행여 강원도 장에서 물건을 못 사는 경우엔 장차를 타지 못하고 기차나 버스를 타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박종용은 주로 영월의 주천장과 평창의 대화장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사통팔달의 철도를 따라 형성된 약초시장]
제천약초시장을 찾아가려면, 고추시장에서 나와 맞은편 큰길을 건너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가서 화산동을 찾아가야 한다. 화산동 초입의 큰길 맞은편으로 GS칼텍스주유소가 보이는데, 주유소 옆으로 약초시장을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약초시장은 잘 정돈된 상가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제천약초시장 상가번영회 박철희에 의하면, 제천약초시장의 경우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중앙동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큰 규모는 아니었고, 작게 형성되어 있었다. 약초상의 점포는 대략 10곳 미만이었다. 과거 중앙동에서 약초시장은 두 군데 정도 나누어 밀집되어 있었다.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은 현재의 목화예식장과 은진슈퍼 근처였다. 나머지 한 곳은 현재 기업은행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 당시 점포 없이 약초를 직접 재배하는 농민들은 집에서 가공해서 팔았기 때문에 산지에서 직접적으로 약초의 거래와 판매가 주로 이루어졌다.
약초시장은 1987년 용두천 복개공사가 이루어지기 직전 화산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현재 점포 수는 69개 정도 된다. 약초시장의 경우 주로 약초 채취가 많은 가을에 물량이 많다. 이때 소매 시장을 중심으로 물품을 유통시키고, 판매를 통하여 수익을 올린다. 주로 서울의 경동시장이나 대구의 약령시, 충청남도 금산, 경상북도 영천 등으로 많이 팔려 나간다. 제천약초시장의 경우 이들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한다.
강원도의 경우 약재 생산이 많은 지역이다. 강원도 인근의 평창이나 정선의 약재들이 태백선을 통해 제천으로 와서 판매된다. 다시 중앙선 기차를 통하여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와서 약재들을 사가는 식이다.
제천약초시장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약초는 황기다. 황기는 가을에 채취 하지만 주로 여름에 판매가 많은 약초이다. 제천 지역의 경우 일교차가 심한 분지 지형이며 토양이 사질양토(沙質壤土)인데, 황기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기에 적합한 약재여서 현재 제천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다. 2010 제천 한방 바이오 엑스포가 열리면서 약초시장 또한 주목 받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산 약재들이 들어오면서 약초시장의 사정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철도 교통과 도로 교통이 교차하는 중앙동]
제천 시내의 중앙시장이 현재에도 태백상권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철도 교통의 발달과 연관되어 있다. 발달된 철도 교통으로 인해 제천시는 인근 강원 지역을 생활권으로 흡수하고 있다. 제천의 인근 지역 생활권 흡수는 과거 장꾼들이 장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의 제천장 상권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과거 장차의 중심지 또한 제천 지역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장차가 소멸한 후 이동 수단으로 제천의 편리한 교통수단인 기차가 이를 대신하게 된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제천 지역 시장의 물산의 흐름에 있어서도 철도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물건을 사러 가는 것도 기차를 이용하고, 물건을 사가지고 가는 사람도 기차를 이용하고 있다. 박종용의 장차 시절 이야기 속에서도 기차는 장차와 병행하여 물산의 흐름에 유용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 제천역과 봉양역 사이에 기차의 객차나 화차를 분리하고 그 연결을 조절하는 동양 최대 규모의 조차장이 설치된 것과 관련이 있다.
더불어 발달된 철도를 이용하여 강원도 사람들은 제천 지역으로 왕래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기차를 타고 강원도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던 ‘번개시장’이 장락역에 형성되었던 것은 눈여겨 볼만하다. 장락역의 번개시장은 1970년대 탄광업이 발달했던 강원도 사람들에게 채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장락역의 번개시장 개설은 제천의 태백상권 배후지 역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
철도 교통과 더불어 제천 지역의 도로 교통 통한 강원도와 경상도를 향한 진입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 시대 경상도 북부에 사는 선비들은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갈 때 반드시 문경의 죽령을 넘고 이곳 박달재를 넘어 한양으로 갔다. 박달재는 고려 시대 거란족이 침공했을 때 대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박달재에서 더 이상 거란족이 영남 지방으로 남하하지 못하고, 그 침입이 끝났다. 서울로의 유일한 진입로이면서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제천 지역의 고갯길은 오랜 옛날부터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왔다. 사통팔달의 길목에 서 있는 제천의 유리한 점은 과거 장차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제천의 지리적 특징과 철도와 도로 교통의 발달은 제천이 태백상권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