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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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敎育 |
영어음역 | Geundae Gyoyuk |
영어의미역 | Modern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동환 |
[정의]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이루어진 교육.
[개설]
서구적인 신식학교가 19세기 후반 우리 사회에 도입된 이후 갑오교육개혁, 대한제국기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학교 체제로 정착해 나가게 된다. 신식 학교를 처음 접했을 때 조선의 민중들의 시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신식 학교는 외세와 침탈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식 학교에 대해 처음부터 환영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경과되면서 신식 학교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오고, 지역 주민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요구도 달라지면서 확산되어 나가게 된다.
[근대 교육의 변천 과정]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시기 제천 지역에도 사립 학교 설립이 활발하였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1905년에 권도상이 제천시 한수면에 1983년 폐교된 한수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찬명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것이 제천 지역 초등 교육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사립 찬명학교 외에도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1906년 4월 10일자의 사립 보흥학교[『황성신문』 잡보], 1907년 1월 21일자의 사립 창명학교[『황성신문』 잡보], 1908년 3월 2일자 사립 보통학교 설립[『대한매일신보』 잡보], 1909년 4월 4일자의 노동학교[『대한매일신보』 잡보], 1909년 5월 4일의 부명학교[『황성신문』 잡보], 1909년 5월 9일 여학교 설립 계획[『황성신문』 잡보], 1910년 1월 7일자 구룡의숙[『황성신문』 잡보] 등 학교 설립과 관련된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천 지역 최초의 공립 보통학교는 1908년 사립 측량학교로 출발하여, 1911년에 인가받은 동명초등학교의 전신인 제천공립보통학교이다. 1909년 8월 31일에는 유영기가 청풍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영명학교를 청풍군 내면에 설립하였다. 1912년 3월 청풍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어 4월 1일자로 개교하였다.
1905년 5월에 설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사립 찬명학교는 1919년 12월 황강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고, 이듬해 1월 2학급으로 개교하였다. 1908년에 민영복에 의해 설립된 사립 흥명학교는 1919년 12월에 공립 보통학교 인가를 받아 1920년 4월에 평동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하였고, 1926년 3월에는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었다.
덕산초중학교의 전신인 덕산초등학교는 1915년 11월 설립자인 박내수가 자택에서 설립한 강습소인 내성학교에서 출발하였다. 1921년 9월 사립 덕산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그 후 1923년 6월에 덕산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백운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흥명학교는 1908년 4월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1911년의 자료로 보면, 설립자는 민영복, 교장은 이승호로 신고되어 있었다. 1919년 12월에 공립 보통학교 인가를 받아 1920년 4월에 평동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하였다.
봉양초등학교의 전신인 봉양공립보통학교는 1919년 8월 제천시 봉양읍 주포리에 설립한 모범서당이 전신이다. 1923년 4월 사립 봉양보통학교로 인가받았고, 1928년 3월에 봉양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학교들은 처음에는 주로 사립 학교 또는 강습소, 모범서당을 설립하고, 나중에 공립 보통학교로 전환하는 과정을 겪었다. 사립 찬명학교에서부터 1920년대까지 설립된 모든 학교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공립 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1930년대에 금성공립보통학교, 송학공립보통학교 그리고 한수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 수산공립보통학교 부설 능강간이학교, 대전간이학교, 덕동간이학교가 설립되었다. 1940년대에 산척공립국교 부설 원월간이학교, 장락공립국민학교, 월악공립국민학교, 동막공립국민학교, 봉양공립국민학교 봉남분교장이 설립되었다. 1945년도까지 제천 지역 초등교육기관의 졸업자[원월간이학교 제외]는 8,615명이었다.
제천에 유치원이 생긴 것은 1925년이다. 현 제천제일교회의 전신인 제천교회에서 1925년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중, 1928년 6월 모리시 선교사의 이름으로 동명유치원을 인가 받아 20명 내지 50여 명 규모로 운영하였다. 그리고 동명유치원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교회 측과 당시 교육에 관심이 있던 후원회 간의 갈등으로 제천유치원[1931년 8월 설립]을 따로 운영하게 되었다. 제천유치원은 1934년 2월에는 한봉교, 김동기, 박봉석, 조명구가 주도하여 인가를 받아 50명 내지 70명 규모로 운영하게 되었다. 제천유치원은 일제 강점기 말에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폐원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천에서 중등 교육은 2년제 제천공립농업실수학교가 1936년 3월에 일본인 교원 2명에 한 학년 30여 명 규모로 현재 홍광초등학교 자리에 설립되어 운영된 바 있다. 따라서 제천에 있어서 조선인을 위한 근대적인 중등 교육의 출발점은 1936년도에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천여자중학교와 제천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공립 실업 보습학교 연구 과정 1년 본과 2년 과정인 제천공립실과여학교가 1942년에 60여 명 규모로, 그리고 제천농업고등학교의 전신인 4년제 제천공립농업학교가 1943년도 4월에 60여 명 규모로 설립되었다. 현재와 같은 보통 교육의 성격을 가진 중학교 교육은 해방 이전에 동명초등학교의 전신인 제천소화국민학교에 1943년 4월에 고등과를 설치한 바 있고, 이는 해방 후 1946년 9월에 폐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보통 교육 형태의 중학교 교육은 해방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의의와 평가]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 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지역민의 기여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제 교육 당국은 공립 학교를 인가할 때, 학교설립과 유지에 대한 지역민들의 부담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립 학교의 공립으로의 전환 과정이나, 공립 학교 설립에 주민들의 기여는 필연적이었다. 공립 학교로 전환한 다음에도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면 이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지역민들은 기여하고 있었다. 이처럼 지역민의 광범위한 협조와 더불어 지역 유지의 각고의 노력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과 여러 여건을 감안할 때, 제천 지역민들의 학교 교육에 대한 열망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