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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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伯善 |
영어음역 | Gim Baeks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활동 사항]
김백선(金伯善)[1873~1896]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맹영재가 조직한 포수 부대에 참여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조정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고 절충장군의 첩지까지 받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지자 지평군수 맹영재에게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향의 이춘영(李春永)과 의기투합하였다. 군사적 기반을 가진 김백선과 양반 출신으로 지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이춘영이 손을 잡은 것이다. 김백선과 이춘영은 동료 수백 명을 이끌고 원주의 안창에서 봉기하였다. 이후 김백선은 제천으로 달려가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삼고, 자신은 선봉장으로서 단양의 장회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유인석(柳麟錫)이 대장이 되고 나서도 좌선봉으로서 충주성 전투와 가흥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워 제천 을미 의병의 중요한 전투 현장에 늘 함께하였다.
그러나 평민 장수로서 유생 중심의 지휘부와 불화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1896년(고종 33) 2월 가흥에서 전개된 다른 부대와의 연합 작전에 제대로 호응하지 않았다는 뒷말을 들었으며, 이후 계속된 가흥 작전에서 지휘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일로 대장 앞에서 칼을 빼들고 항의하다가 군령 위반죄로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유인석은 자식보다 아끼는 김백선을 벨 수밖에 없다고 하였으나, 그를 따르던 포군 다수가 이탈하면서 의진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신분 사이의 갈등과 관련된 전기 의병의 한계로 인식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