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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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음역 | Donghak Nongmin Undong |
영어의미역 | Donghak Peasant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1894년 제천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동학 세력의 기반]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토호 세력의 횡포에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들의 봉기가 이어졌는데, 제천 지역의 경우 청풍에서의 농민 항쟁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 농민들의 불만을 결집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세력인 동학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
제천 지역은 일찍부터 동학 세력이 활동한 곳으로 보인다. 최시형(崔時亨)이 인근의 영월에서 오래도록 은신했고, 단양은 동학 경전의 하나인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출판될 정도여서 일찍부터 접주가 두어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와 충돌]
이러한 상황에서 성두한(成斗漢)이라는 걸출한 동학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동향이 관찰된다. 성두한의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지역 유생들이 동학 농민군을 공격하여 이른바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성두한을 비롯한 제천 지역에서의 동학 농민군의 활동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894년(고종 31) 가을의 상황에 대하여 전통적인 유생들은 “사방에 접(接)을 설치하고 공갈하고 위협하여 사람마다 무리에 들도록 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전곡(錢穀)을 빼앗고 남의 분묘를 파내고 남의 집을 태우고 남의 부녀를 겁탈하고 말과 노새, 총과 창 등의 물건을 빼앗으며 마침내 장리(長吏)[수령]를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농단하는 데 이르렀다.”고 동학 세력을 비판했다.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성리학적 질서를 깨뜨리는 것으로 보았다. 나중에 의병 지도자가 된 정운경(鄭雲慶)은 1894년 10월 15일 성두한의 인척이면서 동학의 위세를 내세우는 이성종(李聖鐘)·이주팔(李周八) 등을 습격하여 죽이는 ‘의거’를 단행하기도 했다.
정운경이 동학교도들을 공격한 지 며칠 후 동학 농민군이 몰려들어 군기를 탈취하고 유생들의 집을 불 질렀다. 이 무렵 청풍의 서창에는 2만 명 정도의 농민군이 집결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10월 16일 청풍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패하였다. 이후 농민군들은 영월·평창·정선 쪽으로 이동했으며, 일본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마구 살육하였다. 정운경은 춘천 서쪽 일대는 그나마 유생들이 농민군의 우두머리급을 죽이고 농민들을 해산시킨 덕택에 화를 면했다고 자평했다.
[동학 농민군의 향방]
붕괴된 동학 농민군의 무리는 훗날 의병 세력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유인석(柳麟錫)이 제천에서 처음으로 민회를 개최할 때도 동학군이 다수 동참했으며, 정식으로 호좌의진을 출범시킬 때도 동학의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경험한 반외세 무장 항전의 역사적 경험은 그들과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봉건 유생층이 주도하는 의병 항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