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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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達嶺激戰地 |
영어음역 | Bakdaljae Gyeokjeonji |
영어의미역 | Bakdaljae Battlefield |
이칭/별칭 | 박달재 전적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류금열 |
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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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격전지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격전지.
[변천]
1216년(고종 3)에 거란 왕자가 대요수국 왕이라 자칭함에 따라 몽고군에게 쫓기게 된 거란대군 10만 명이 내침을 하였다. 1217년(고종 4) 7월 고려군은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휘하에 박달재의 협곡과 고갯마루의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적군을 협공으로 퇴각시켰다. 이후 1258년(고종 45)에 몽고군이 침략했을 때 충주, 제천, 청풍의 별초군이 몽고군을 격파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현대에 이르러 국도 38호선 고갯마루에 간이 정류소를 설치하여 주점과 매점이 들어서면서 격전지의 유적은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다. 오늘날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의 지경의 국도 38호선에 박달재 터널[1.5㎞]을 굴착하였고, 고갯마루에 각종 편의 시설이 들어서고 도로가 공원화됨에 따라 박달산 방면과 주론산 방면의 산기슭은 원형을 찾기가 힘들다. 기존의 고갯마루에서 평토 작업을 하면서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보이는 산기슭은 오래전에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여지도서(輿地圖書)』 제천현 산천조에 “박달산은 현에서 서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주유산의 남쪽 줄기이다. 곧 고려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적[丹賊]을 물리친 처소(處所)이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김취려 장군의 전적지인 박달재는 지금의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와 봉양읍 원박리 고갯마루[453m]이다. 정상부에 측량 기준점이 있는데, 좌표는 북위 37°08′, 동경 128°03′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박달재에서 김취려 장군의 격전지는 평토 작업으로 인해 지명만 전승하고 있고, 발굴이나 기타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황]
1990년 10월 박달재 고갯마루에 제천시 백운면 노인회에서 김취려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갓석이 위치하고 있다. 비신[143×54×25㎝] 앞면에 ‘김취려장군전적비’라 새기고, 뒷면에 김취려 장군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박달재 안국사(安國寺)에서 세운 ‘고려명장김취려장군대첩비(高麗名將金就礪將軍大捷碑)’와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기마상’, 4장군 동상이 있다. 이 밖에 박달재 격전지에는 1988년 9월 20일에 세운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와 1997년에 세운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동상이 있고, 2008년에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사연을 형상한 조각품과 함께 목각공원에 박달금봉 가묘 등을 조성했다.
[의의와 평가]
고려를 침범한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했으나 김취려 장군이 제천 박달재의 지형지세를 십분 활용하여 격퇴시키면서 국가의 전란을 수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전적지를 기리기 위하여 ‘김취려장군전적비’가 세워지고, 한 개인이 김취려 장군을 모의한 동상과 비문을 세워서 전적을 승화하고 있으나 복합적인 문화 양상으로 정체성을 모색할 수 없는 실정이므로 박달재를 비롯해 좌우 산기슭에 거란군과 몽고군을 격퇴한 대첩의 전적지를 승화할 필요성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