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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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炳洙 |
영어공식명칭 | Kim Byungso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병수(金炳洙)[1898~1951]는 1898년 10월 18일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의 권유로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가지고 1919년 2월 25일 군산으로 내려갔다. 이튿날인 2월 26일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朴淵世)를 만나 서울의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전하고 군산에서도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일에는 박연세의 집에서 이두열·김수열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여 3월 5일 군산에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군산에서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김병수는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학생 대표인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壁) 등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김병수는 1921년 군산 야소교병원에서 근무하였고, 1923년 익산에 삼산의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사재를 들여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공헌하였다. 익산제일교회의 장로가 된 김병수는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청년회관을 건립하는 등 익산 지역 발전을 위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51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병수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