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일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87
한자 孤潭逸稿
영어공식명칭 Godamilg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고담일고』 저술
편찬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고담일고』 편찬
간행 시기/일시 1891년연표보기 - 『고담일고』 간행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한중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문집
저자 이순인
편자 이진옥|이진기
간행자 이진옥|이진기
권책 5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30.7×19.5 ㎝
어미 상2엽 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
권수제 고담일고
판심제 고담일고
문화재 지정 번호 이순인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조선 전기 문장가 이순인의 문집.

[개설]

이순인(李純仁)[1533~1592]은 선조 때 ‘8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고, 많은 문장을 남겼다. 전란 등으로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후손 이진옥(李鎭玉)과 이진기(李鎭琦) 등이 수집해 1890년 한장석의 서문을 받아 5권 2책의 목활자본 『고담일고(孤潭逸稿)』를 간행하였다. 권수와 권미에 서문과 발문이 있다. 권1과 권2는 시, 권3은 문장, 권4는 저자와 관련된 인물의 글을 모은 잡저(雜著)이고, 권5는 저자의 행적을 서술한 후인들의 글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이순인은 자는 백생(伯生), 호는 고담(孤潭), 본관은 전의(全義)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현령 이홍(李弘)이고 모친은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생원 박함(朴諴)의 딸이다. 이순인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부친이 죽고, 일곱 살 때에는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 고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살 때에 이중호(李仲虎)에게 나아가 부지런히 수학하여 문장과 학술이 크게 진보하였으며, 사서(四書)와 성리서에도 뛰어난 조예를 보였다. 스무 살에 이황(李滉)과 조식(曹植)에게 배움을 청하였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과도 왕래하며 학문을 갈고 닦았다. 1564년(명종 1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유생들과 함께 승려 보우(普雨)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고, 1570년(선조3)에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네 명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1572년(선조 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과 봉교를 지냈다. 이때 선조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자수궁(慈壽宮)의 여승이 금강산에서 불사를 일으키자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

1575년에는 성균관전적과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이후 병조좌랑·사언부정언을 거쳐 1577년 가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576년 사헌부정언을 맡았을 때에는 이기(李芑), 윤원형(尹元衡), 정순명(鄭順命), 임백령(林百齡) 등이 을사사화 때 받은 위훈(僞勳)을 삭제할 것을 청하였다. 1580년에는 종묘에서 여악(女樂)이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을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581년 사헌부집의로 재직할 당시 삼사에서 이이에 대해 시비를 따지며 비난하자 이이를 옹호하였다. 1586년 다시 사간에 임명되고 동부승지, 형조참의를 거쳐, 승문원제조가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588년에는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어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된 자들을 구원하다가 파직되자,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 선조를 호위하였는데, 중전과 동궁을 모시고 평안도 성천에 이르렀을 때 과로로 쓰러져 결국 세상을 떴다.

이순인은 특히 문장에 뛰어나 당시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최립(崔岦),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8문장’이라고 불렸다. 1594년 사위 이정립(李廷立)의 주선으로 조상의 무덤이 있는 전라도 여산군 전다동(田多洞)에 이장하였다. 후일 여산의 봉곡사(鳳谷祠)에 배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이순인은 선조 때의 8문장으로 알려질 정도로 많은 문장을 남겼으나, 전란으로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에 10대손 이진옥(李鎭玉)과 이진기(李鎭琦)가 글을 모으고 1890년 한장석(韓章錫)의 서문을 받아 1891년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고담일고』는 목활자본(古活字本)으로 간행된 5권 2책의 문집이다. 책의 형태는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며 반곽(半郭)의 크기는 21.2×14.8㎝이다. 10행 20자이며, 주는 쌍행(雙行)이다. 어미는 상2엽 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며, 책의 크기는 30.7×19.5㎝이다.

[구성/내용]

권수에는 이순인의 공적과 문집이 간행된 경위를 적은 한장석(韓章錫)의 서문과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오언고시 100수, 오언절구 26수, 칠언절구 139수가 수록되어 있고, 권2에는 오언율시 49수, 칠언율시 57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황이나 조식, 성혼, 송익필을 비롯하여 그가 학문을 배우고 함께하였던 인물들에게 보낸 시를 많이 남겼고, 연곡사(燕谷寺), 중흥사(中興寺), 봉은사(奉恩寺), 금산사(金山寺), 회암사(檜巖寺) 등 명승 사찰에 관한 시도 많이 남아 있다. 이순인의 시는 8문장 중 한 사람으로서 시격이 청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권3에는 명종 때 윤원형 일파의 위훈을 삭탈할 것을 요청하는 소(疏) 여섯 편과 이순인 등의 상소에 따라 삭훈을 지시한 교문(敎文) 한 편, 스승 이황이 타계하자 보낸 제문(祭文) 한 편, 그리고 부(賦)·시(詩)·표(表)·책(策)은 과거 글로서 각각 한 편씩 실려 있다.

권4는 부록으로, 저자와 관련된 시와 「잡저(雜著)」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이황, 박상(朴祥), 이이, 송익필, 고경명(高敬命), 백광훈(白光勳)이 지었는데, 특히 백광훈이 보낸 시가 많다. 「잡저」는 임란 때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내린 호성녹권(扈聖錄券)과 교서가 맨 앞에 실려 있고, 이어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 성혼·이이·이수광(李睟光)·이호민(李好閔)·이산해(李山海) 등이 쓴 이순인과 관련된 글, 『여산읍지』「인물」 편에 실린 저자에 대한 평가, 이진옥이 갖고 있었던 이순인 묵적에 관하여 임헌회(任憲晦)가 지은 「고담선생수묵발(孤潭先生手墨跋)」 등이 실려 있다.

권5도 부록으로, 저자의 행적에 관한 후인들의 글이다. 「행장(行狀)」은 외손인 이진담(李眞聃)이 지었고, 「가장(家狀)」은 1861년 후손인 이진옥(李鎭玉)이 지었다. 「유사(遺事)」는 1861년에 이진옥의 동문인 조병덕(趙秉悳)이 쓰고, 신도비명(神道碑銘)은 1862년 이진옥의 동문인 임헌회(任憲晦)가 지었다. 마지막 「추록(追錄)」에는 저자의 조부 첨정공(僉正公) 이사겸(李思謙)의 묘갈명을 비롯해서 저자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이 다섯 편 수록되어 있다.

권미에는 1891년 『고담일고』를 간행하게 된 경위를 밝힌 이진옥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이순인은 선조 때 ‘8문장’으로 칭해질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청아한 품격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담일고』를 통해 그 편린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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