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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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立益山博物館所藏- |
영어공식명칭 | Go stone, the director of Iksan National Museu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기양리 104-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최경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9년 9월 29일~2010년 7월 5일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기단부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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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발굴 시기/일시 | 2009년 12월 4일 - 국립익산박물관 소장 바둑돌 출토 |
현 소장처 | 국립익산박물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기양리 104-1] |
출토|발견지 | 미륵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
성격 | 바둑돌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길이,너비) | 1.4㎝[1점 길이]|1.3㎝[1점 너비]|0.6㎝[1점 두께]|1.7㎝[2점 길이]|1.5㎝[2점 너비]|0.45㎝[2점 두께]|2.4㎝[3점 길이]|1.8㎝[3점 너비]|0.2㎝[3점 두께]|1~5㎝[미륵사지 출토 길이]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익산박물관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된 삼국 시대 석제 바둑돌.
[개설]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된 바둑돌은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석제 바둑돌이다. 우리나라에 바둑이 도입된 시기는 늦어도 삼국 시대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개로왕[재위 455~475]이 고구려 승려 도림과 바둑 두기에 빠져 국력을 기울게 하는 대형 공사를 벌였고 그 결과 자신의 목숨과 한성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효성왕[재위 737~742]이 즉위하기 전 신충과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삼국사기』,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효성왕 시기 기록에서는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두었다는 내용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문헌에도 바둑에 대한 기록이 많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3세기 중엽의 인물인 곽희분, 조정통 등이 원[몽골]으로 바둑 원정을 갔다고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고려인들의 바둑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형태]
미륵사지 서탑 기단부 진단구 중에는 바둑알로 추정되는 납작한 돌 3점이 출토되었는데, 돌 3점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표면은 매끄럽고 납작하다. 크기는 길이 1.4㎝, 너비 1.3㎝, 두께 0.6㎝인 것이 있고, 길이 1.7㎝, 너비 1.5㎝, 두께 0.45㎝인 것이 있으며, 길이 2.4㎝, 너비 1.8㎝, 두께 0.2㎝인 것이 있다. 미륵사지 발굴 조사 중에서도 여러 점의 바둑돌이 출토되었는데 표면이 거칠고 검은색과 그렇지 않은 색으로 나뉜다. 총 34점이며 크기는 1~1.5㎝이다.
[특징]
미륵사지 서탑 기단부에서 출토된 바둑돌은 백제 지역에서 거의 발견된 적 없는 바둑돌의 실물 자료이다. 한편 신라 지역에서도 5~7세기 무렵의 바둑알이나 바둑판 추정 유물이 보고된 바 있다. 7세기 초의 횡혈식 석실분인 경주 용강동 6호분의 바닥에서는 둥그스름하게 모여 두 무더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원래는 원형 나무통에 담겨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남대총에서는 243점, 천마총에서도 350점의 바둑알로 추정되는 돌이 출토되었다. 한편 분황사에서는 가로 42㎝, 세로 43㎝의 현대 바둑판 규격[가로42㎝, 세로45㎝]과 거의 같은 전돌이 수습되었다. 한쪽 면 15줄의 바둑판 모양이 규칙적으로 그어졌다. 칸 너비는 평균 2.8㎝로 현대 바둑판[2.3㎝]과 유사하지만 화점은 없다.
[의의와 평가]
백제 지역에서 거의 발견된 적이 없었던 바둑돌로, 삼국 시대 바둑이 도입되었음을 알려 주는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