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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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鎬正 |
영어공식명칭 | I Hojeong |
이칭/별칭 | 영진(榮珍),검파(儉坡)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개항기 함안 출신의 유학자.
[개설]
이호정(李鎬正)[1897~1971]은 개항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중년 이후에는 6·25 전쟁을 겪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어려운 시기를 살았지만, 학문을 탐구하고 심신을 수양하며 집안과 지역 사회에서 선행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평(廣平). 자는 영진(榮珍), 호는 검파(儉坡). 증조할아버지는 붕산(朋山)이국엽(李國燁)이고, 할아버지는 이치림(李致林)이다. 아버지는 농은(農隱)이찬기(李瓚基)이며, 어머니는 안장원(安章遠)의 딸 광주 안씨(廣州安氏)이다. 부인은 안의중(安議中)의 딸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강숙(李康淑)과 이양숙(李亮淑)이며, 사위는 이길세(李吉世)와 이종오(李鍾五)이다.
[활동 사항]
이호정은 1897년 8월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동지산의 세거지에서 태어났다. 작은아버지 이택기(李澤基)가 후사 없이 별세하자 아버지의 명에 따라 양자로 입양되어 제사를 이어갔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김해로 피난하였다. 1968년 함안 향교(咸安鄕校)의 전교(典校)로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았지만 이호정은 학문을 탐구하고 심신을 수양하며 집안의 가풍을 유지하기 노력하였다. 선조 황곡(篁谷)이칭(李偁)의 묘사를 위해 봉양재(鳳陽齋) 건립을 주도하였으며, 증조할아버지 이하 3대 및 어머니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지역의 선현을 추모하는 사업에도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는데, 특히 만최(晩最)이태문(李泰文)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삶을 살았으므로 그의 행장을 지은 괴은(槐隱)조전규(趙典奎)는 ‘당대의 선인(善人)’이라고 칭송하였다.
1969년 송산(松山)조명제(趙命濟), 송포(松圃)조상제(趙祥濟), 여초(廬樵)이현관(李鉉瓘), 대포(大圃)이인권(李麟權), 죽천(竹泉)조선규(趙善奎) 등과 우인계(友仁契)를 결성하여 함께 시를 창수(唱酬)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중검암(中儉巖)검천(儉川) 옆에 검파정(儉坡亭)을 짓고 그 이름으로 자호를 삼았다.
[학문과 저술]
7세에 족숙인 학산(學山)이회지(李會智)에게 배웠다. 19세 되던 1915년 일산(一山)조병규(趙昺奎)와 금계(錦溪)조석제(趙錫濟)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또한 성암(誠庵)노근용(盧根容), 도천(陶川)안유상(安有商), 우산(芋山)이훈호(李熏浩) 등을 종유하며 배웠다. 도의로서 사귄 인물들은 후재(厚齋)이정기(李珵基), 중재(重齋)김황(金榥), 근파(槿坡)안종희(安鍾禧), 도산(濤山)성순영(成純永), 연계(硯溪)조열제(趙說濟), 휴산(休山)조성옹(趙性顒), 괴은조전규 등이다. 1972년 『검파집(儉坡集)』 5권 2책이 간행되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동지산 대촌(大村) 곁 해좌(亥坐) 언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