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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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鶴峯金誠一先生遺墟址 |
영어의미역 | Historical Ruins of Master Hakbong Gim Seongil |
이칭/별칭 | 대수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산8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덕현 |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산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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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유허지 |
관리자 | 마을 공동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 있는 김성일(金誠一)의 유허지.
[개설]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4월 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흩어진 관병을 수습하고 경상도 일대의 의병을 일으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경상우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왜군의 호남 진출로가 되는 진주성 방어 전략을 지휘하여 마침내 임진왜란 초기의 대승리인 진주성 대첩[1592년 10월]을 이끌었다.
진주성 전투 중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전사하였고 왜군이 다시 침공할 것에 대비하여, 김성일은 진주성에서 방어를 지휘하던 중 1593년 4월 병사하였다. 함께 의병 활동을 하던 이노(李魯), 박성, 조종도(趙宗道) 등이 김성일의 관을 운구하여 지리산 아래에 임시로 묻었다가, 11월에 영구를 고향 안동 선영으로 모셨다. 임시로 김성일의 관을 매장하였던 곳은 큰 숲이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임시로 머문 마을 이름을 정구(停柩), 그 나무를 대수(大樹)라 하였으며, 일대 숲을 대수정(大樹亭)이라고 불렀다.
[위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산80번지로 월횡교 아래편 산록 대수정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학봉 김성일 선생 유허지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으며, 현재 문헌 기록을 통한 고증 단계에 있다. 관련 기록을 보면, 『학봉집(鶴峰集)』 부록 제1권 연보(年譜) 만력 21년[1593년] 선생 56세조에 의하면, “4월 29일에 진주의 공관에서 졸하였다. 염습(殮襲)과 입관(入棺)을 마치고 지리산에 임시로 묻었다.” 주(註)에는 “상여가 가다가 어떤 마을의 나무 아래에서 멈췄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 이름을 ‘정구(停柩)’라 하고 그 나무를 ‘대수(大樹)’라고 하여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임시로 묻는 뒤에는 모든 사람이 서로 더불어 울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5월에 장자 김집(金潗)이 상사를 듣고 샛길로 남쪽으로 분상하여 묘소 아래 여막을 짓고 거처하였다. 여러 차례 적의 칼날을 겪었으나 마침내 범하는 바가 없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부보해 주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인력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11월에 비로소 영구를 모시고 환향하였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노의 『문수지(文殊誌)』에는, “4월 그믐날에 공이 졸하였다. 이노가 박성 등과 함께 곡하고 염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김역 또한 죽었다. 박성은 고을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 짜는 것을 감독하고, 이노는 두류산 밑에 들어가서 임시로 장례 지낼 묘혈을 파는 일을 감독하였다. 3일 뒤에 박성이 단성현감 조종도와 함께 관을 호송하고 이르러 그날로 장사를 마쳤다. 그러고는 세 사람이 모두 손을 잡고 사모하는 마음에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서로 목 놓아 오래도록 통곡한 다음 흩어졌다.”라고 나와 있다.
『진양속지(晉陽續誌)』의 대수정 항목에는, “진주 서쪽 월횡촌[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앞이다. 계사년 학봉 김문충공이 진주성에서 돌아가셨다. 상여가 고향으로 가시는데 난리중이라 부득이 샛길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성[박대암], 조종도[조대소헌], 이노[이송암] 등 여러 명이 관을 부축하여 지리산 아래에 잠시 머물도록 하였다. 상여가 쉰 곳이 바로 이 숲 속이다. 나중에 이 숲을 벌목하려는 이가 있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道)[1593~1666]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감당시(甘棠詩)’를 인용하여 선정을 베푼 학봉 선생의 상여가 머물렀던 숲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꾸짖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옥종면지(玉宗面誌)』의 ‘대수(大樹)’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조 중엽의 여러 문헌에 의하면, 월횡교 남쪽 산자락 일대 3천여 평에는 대수(大樹) 천여 그루가 우거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경절공 하숙보, 겸재 하홍도 등 여러 명현이 즐겨 놀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지난날 이 강변 일대의 경승을 짐작할 수 있다.” 『옥종면지』 편집 위원장이었던 하유집(河有輯)의 증언에 의하면 “대수정은 하동군 옥종면의 도덕천 변 진주에서 월횡리 들어가는 입구 월횡교 남쪽 산자락의 큰 숲이다. 지금은 경지로 변하여 대부분 사라지고 산기슭 일부에 자취가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양지』에 ‘대수정’으로 기록되어 있는 학봉 김성일 선생 유허지는 “선정을 베푼 학봉 선생의 상여가 머물렀던 숲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취지로 큰 숲으로 보전되었다. 아름다운 풍치림을 이루어 도덕천 변의 경승지가 되었으나, 최근에는 도로 개설과 경지화로 대부분 훼손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도의 군·관·민을 잘 이끌어 지역을 지킨 김성일의 유허지이므로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로서 기념하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