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8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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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詠靑鶴洞瀑布-曺植- |
영어의미역 | Recite a poem of Cheonghakdong |
이칭/별칭 | 「청학동 폭포를 읊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석기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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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72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
성격 | 한시|서정시|유산시|유선시 |
작가 | 조식(曺植)[1501~1572] |
[정의]
조선 전기 조식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쌍계사 위 불일폭포를 유람하면서 지은 한시.
[개설]
「영청학동폭포(詠靑鶴洞瀑布)」는 조식(曺植)[1501~1572]의 『남명집(南冥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조식이 하동 청학동을 유람할 때 지은 한시인데, 정확히 어느 해에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조식은 1558년(명종 13) 진주목사 등 진주 인근의 여러 명사들과 지리산[1,915m]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유람한 적이 있기 때문에 1558년 유람 때 지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식의 자는 건중(健仲), 호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부친은 조언형(曺彦亨)이며, 합천군 삼가면의 토동(兎洞)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을 따라 어려서 한양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25살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말을 보고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 때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학문에 침잠하여 명성이 났으며, 45세부터는 합천군 삼가에 살았다. 61세 때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다가 별세하였다.
조식은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단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1555년(명종 10)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와, 선조 즉위 초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는 노성한 학자가 국가를 바르게 경영할 철학을 임금에게 간곡하게 아뢴 상소문이다. 학문은 이론적 탐구를 지양하고 심성 수양을 통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마음을 경(敬)에 두고 의(義)를 행하는 거경행의(居敬行義)를 내세워 흔히 경의학(敬義學)이라 한다.
조식은 천리를 마음에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기 위한 심성 수양의 방법으로,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는 문구를 새긴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늘 차고 다니며 사욕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심을 떨쳐 내려 하였다. 이런 그의 학문 정신은 「신명사도(神明舍圖)」에 집약되어 있다.
[구성]
기승전결의 구성법에 맞추어 시상이 전개되었다.
[내용]
경적층애당(勍敵層崖當)[굳센 적이 층층의 벼랑에 막아섰기에]
용당투미휴(舂撞闘未休)[찧고 두드리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네]
각혐요저벽(却嫌堯抵璧)[요가 임금 되어 산에 구슬 버린 것 싫어]
여토부증휴(茹吐不曾休)[마시고 토하기를 일찍이 쉰 적이 없다네]
제3구는 시상이 전환되는 곳이다. 조식은 불일폭포를 보면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폭포수와 그 물이 흘러가는 것을 막고 선 벼랑을 대비시켜 물과 벼랑의 투쟁으로 묘사한 뒤, 그 이유를 고사를 빌어 노래하고 있다. 『포박자(抱朴子)』에 의하면 “요가 임금이 되자 금을 산에 버렸고, 순이 선양을 받자 구슬을 산에 버렸다”고 한다. 이는 금은 같은 보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말한다.
요순은 보물을 산에 버렸지만, 산의 입장에서 보면 혐의쩍은 일이다. 그래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웅덩이는 그 구슬을 끝없이 토해 내고 있는 것이라고 조식은 생각하였다. 털끝만큼의 물욕도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게 하려고 평생 노력한 조식은 불일폭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특징]
운자는 ‘휴(休)’자를 두 번 연이어 썼다.
[의의와 평가]
「영청학동폭포」는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전하는 심성 수양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던 조선 전기 도학자 조식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한시이다. 산수를 유람하면서도 자아를 성찰하여 심성을 수양하려 하였던 조식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