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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폭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690
한자 翫瀑臺-玩瀑臺
영어의미역 Wanpokdae Rock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성격 바위|유적
관련 인물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조위한(趙緯韓)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하동 유람록에 자주 등장하는 바위.

[개설]

완폭대(翫瀑臺)’의 ‘폭’은 불일폭포를 말하는 것으로,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뜻이다. 완폭대불일암(佛日庵) 바로 앞에 있던 바위로, 불일폭포청학동 경관을 조망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청학동을 유람하던 선비들이 유람록에서 자주 언급함으로써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위치]

불일암불일폭포청학동 주변 경관을 완상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으로 애용되었으나, 현재는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유람록의 기록에 나타나는 위치는 대강 일치한다. 불일암 바로 앞에 있으며, 그 아래에는 바로 못이 있다고 하였다. 곧 용소(龍沼) 또는 학추(鶴湫)로 불리던 못으로,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이 고인 웅덩이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지금의 불일암 바로 앞에서 불일폭포 쪽으로 난 어디쯤에 있는 바위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형태]

완폭대는 현재 그 위치와 형태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뿐이다. ‘완폭대’ 세 글자는 청학동에서 신선이 되어 산다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썼다고 전한다. 1618년(광해군 10) 4월 11일부터 4월 17일까지 7일 동안 하동 청학동을 유람하였던 조위한(趙緯韓)「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절 앞에 10여 명이 앉을 만 한 대(臺)가 있었다. 바위에 ‘완폭대(翫瀑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또한 고운이 직접 쓴 것이다. 다섯 사람이 대 위에 둘러앉아 술잔을 씻어 술을 따랐다. …… 대 앞에 오래된 나무들이 나열해 있었는데, 이전에 유람한 사람들이 껍질을 벗기고 이름을 새긴 것이 매우 많았다. 30년 전에 남긴 자취인데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심생과 방생이 폭포가 떨어지는 곳까지 살펴보려고 절벽을 타고 내려갔는데, 방생은 중도에 돌아오고 심생은 그 밑에까지 내려가서 전체를 조망하고 왔다. 함께 시를 읊조리고 감상하느라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이 기록을 통해 완폭대는 10여 명이 앉아 술자리를 펼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바위이며, 바위에는 ‘완폭대’ 외에도 유람 온 자들의 이름이 여럿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2018년 5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의 역사문화자원 조사 중 쌍계사 뒷편 불일암 아래에서 완폭대 석각이 발견되었다. 석각 발견 이전까지 완폭대는 그 위치나 형태조차 아는 이가 드물고, 오로지 과거 선현들의 유람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될 뿐이었다. 새로 발견된 완폭대 석각은 폭 150㎝, 높이 140㎝의 암석에 음각으로 翫瀑臺 세 자가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과거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은 최고봉인 천왕봉과 지식인의 이상향인 하동 청학동으로의 유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현실과의 부조화를 위로받고 안식을 얻기 위한 이상향으로 화개 청학동 일대를 찾았던 것이다. 때문에 청학동 유람록에는 수많은 유적들이 나타나고, 그 유적에는 선현들의 자취와 정신과 풍류가 녹아 있다. 완폭대청학동 유람의 마지막 캠프이자 정점이었다. 이에 대한 조사와 발굴 및 복원을 통해 선현들의 청학동 유람이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2018년 5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의 역사문화자원 조사 중 발견된 완폭대 석각은 완폭대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5.11 완폭대 석각 관련 사항 추가 완폭대 석각 관련 사항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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