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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318
한자 姜佑錫
영어음역 Gang Useok
이칭/별칭 경허(耕虛)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1286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숙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3월 9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0년 7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월 27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29일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65년 7월 9일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1286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진주
대표 경력 진주 YMCA 창립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강우석(姜佑錫)은 1901년(고종 38) 3월 9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1286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하여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 해 9월 기독교 게통의 진주 광림학교(光林學校) 교사로 재직 중, 홍수원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한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혈성단은 상해 임시 정부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주로 군자금 모집 활동과 임시 정부의 선전 활동을 폈다. 강우석은 박만선(朴萬善) 등과 함께 오재영(吳哉泳), 김두현(金斗鉉)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을 배부 받아 각처에 배포함으로써 상해 임시 정부의 선전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당시 국내 독립운동계는 1919년 9월 상해 임시 정부와 노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하나로 합쳐 통합 임시 정부를 설립하게 됨에 따라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 운동 때처럼 거족적인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서로 연대하면서 만세 운동을 추진해 갔다. 이에 강우석을 비롯한 혈성단원들도 이와 같은 ‘제2회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사전 발각되면서 1919년 11월 초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던 강우석은 출옥 후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강우석은 김정도·홍수원·여병섭·한규상·김주학·정성도·심두섭 등과 함께 1920년 7월 진주 YMCA를 창립하였으나, 1921년 1월 27일 다시 징역 8월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1월부터는 『동아일보』 하동지국에서 일하면서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고, 1925년에는 마산에서 창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신간회 마산지회 창립을 주도한 혐의로 검거되어 8개월간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되어 전국 각처에 지회가 조직될 때, 강우석은 마산지회 창립에 큰 힘을 쏟아 1927년 12월 29일 세칙제정위원(細則制定委員)과 본 대회에 제출할 건의안 작성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1월 1일가족과 친인척의 협력으로 사천시 서포면 신흥마을 뒷산에 공적비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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