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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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顯周 |
영어음역 | Gim Hyeonju |
이칭/별칭 | 사현(士見),귤은(橘隱)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길찬 |
출생 시기/일시 | 18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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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12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
비 |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고이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정의]
개항기 하동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현(士見), 호는 귤은(橘隱). 안경공(安敬公)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이다. 친아버지는 김성두(金星斗), 친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며, 양아버지는 김문두(金文斗), 양어머니는 강성 문씨(江城 文氏)[남평 문씨]다.
[활동 사항]
김현주(金顯周)는 1858년(철종 9)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에서 태어나, 훗날 진교면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성이 순수하고 두터워서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효도하고 근신하며 착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님의 명이 있어야만 행동하였다. 숙부에게 양자로 가서는 친자식처럼 잠자리를 살피고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어머니가 몸져누웠을 때에는 밤에도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손발이 되어 드렸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3년이나 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홀로 남은 아버지의 외로움을 달래 드리려고 아버지 방 옆에 별도로 방을 만들어 놓고 모시면서 기쁘게 해 드렸다. 아버지가 부스럼이 나서 잘 낫지 않자 60세가 넘은 몸으로 아버지 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아버지께 드릴 약을 일일이 맛보며 정성을 다하여 모셨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자 슬픔과 예를 극진히 하였으며, 그 뒤에도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김현주가 죽은 뒤 이직현(李直鉉)이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권상연(權相淵)이 갈명(碣銘)[머리가 둥근 비석. 넓은 의미로 비석 한 가지]을 지었다. 묘비는 진교면 고이리 이곡마을에 있는데, 화강암으로 몸돌은 규형이고, 운주형 비석 덮개가 있다. 아들 김민배(金珉培) 역시 효자라 1912년에는 고을의 선비들이 귤은 김해 김공 포효비(橘隱金海金公褒孝碑)를 고이리 고내마을 앞에 세워 부자의 효를 칭송하였다. 권용현이 기문을 짓고, 이병조(李炳祖) 글씨를 썼다. 1924년에는 성균관에서 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을 작성하고, 향교에서 포창문(褒彰文)을 지어 김현주의 효행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