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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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衡平社河東分會 |
영어의미역 | Hyeongpyeongsa Hadong Branch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준형 |
설립 시기/일시 | 1923년 8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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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4월 24일 |
성격 | 사회 운동 단체 |
설립자 | 조동혁|김상원|이원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있었던 조선형평사 소속 분회.
[설립 목적]
형평사 하동분회는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白丁)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한 사회 운동 단체이다.
[변천]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의 사회 운동가들과 백정들이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를 창립하고 발기 총회를 열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 지사와 분사가 설치되었고 하동에서도 1923년 8월 19일 조동혁(趙東爀), 김상원(金翔源), 이원렬(李元烈) 등의 주동으로 형평사 하동분회를 창립하여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존엄성을 강조하고 신분 해방을 목표로 투쟁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한동안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26년 말경에는 이 기관의 간판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활동이 미미해졌다. 이는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과 함께 소속 회원들이 다른 사상운동에 참여하면서 점차 운동의 중심이 전체적인 무산운동(無産運動) 등으로 흘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형평사 하동분회의 활동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일부 반대 세력들이 형평사가 백정들의 버릇을 버려 놓고 있다며 창립 대회를 방해하고 그 후 계속하여 우육 비매 동맹(牛肉非賣同盟) 등의 운동을 벌여 나갔으며 심지어 청년회와 노농회의 이름으로 형평사 하동분회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창립 이후 회원들이 단결하여 고기값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식당업자들이 형평사 하동분회 공격을 선동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간에 원만한 해결을 보기도 하였다. 형평사 하동분회의 사업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규모가 작아 진주 본회에서 벌인 사업 내용보다 소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그들 간의 단결과 생존 조건의 개선을 도모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개선되지 않은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존엄성을 사회에 새롭게 인식시키는 데 상당한 정도 기여한 바가 있다. 그러나 활동 후기에는 당시 우리 민족에게 절실했던 독립운동 부문이 약화되고 변질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